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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쳤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미쳤다. 고로 존재한다.”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9.10.31 15: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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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치광이의 고달픈 삶을 다룬 영화 <조커>가 이런 추세로라면 관객 1천만 명을 넘어설 기세다. 고담시의 광대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모두가 미쳐가는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맨정신으로는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서 스스로 미쳐버린다. 영화 속 1980년대 초반의 고담시는 지금의 우리 도시와 같다. 세상은 말 그대로 가진 자들의 세계다. 극소수 상류층이 이기심과 탐욕을 부리지만, 그들이 소유한 언론은 철저히 눈을 감는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에 나서 쓰레기가 넘쳐 벌레와 쥐가 들끓고 상류층에 피해가 생겨야만, 언론에서는 이 사실을 보도한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아무런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회사에서는 해고를 당하고,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괄시를 당하는 아서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왠지 가진 자들 앞에 잔뜩 위축돼 있을 ‘나와 내 이웃’의 처지가 떠오른다. 광대 분장을 한 아서가 극도의 광기에 못 이겨 연쇄 살해를 저지르는 것으로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장면에서, 그가 어쩌면 마음속으로 외쳤을 명제를 헤아려본다. 

“나는 미쳤다. 고로 존재한다!”

조커가 사는 영화 속 세상,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실 속 세상은 모두 미쳐있고, 또 미쳐간다. 세상의 광기에 맞선 조커의 ‘몸부림’에 영화 속 사람들이나 영화 밖 관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통쾌한’ 각성과 자성이 아닐까(필자의 이 같은 영화적 이해는 순전히 개인적이다!).   

17세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천명하며, ‘이성적’ 사유와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한 계몽시대의 서막을 예고했으나, 자본주의가 고도화한 현대사회에서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독점한 권력과 자본이 대부분의 피지배자들에게 비이성과 광기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 ‘생각이 없는’ 좀비족들로 내몰았다. <곡성>, <창궐>, <감기>, <부산행>, <킹덤>, <워킹데드>, <28일 이후>, <더 플루>, <멜라니> 같은 좀비 영화들이 공감을 얻는 것은, 데카르트적인 이성 철학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커와 좀비들이 관객들에게 미친 존재감을 안겨준 것은 그들이 단단히 “미쳤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어 말한다면, “나는 미쳤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이다. 광기가 지금처럼 고약한 질병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미셸 푸코(1926~1984)의 『고전 시대 광기의 역사』(1961)를 보면, 원래 광기는 고대로부터 인간 경험의 통상적 일부로 받아들여졌을 뿐, 전혀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기는 신에게 좀 더 다가가서, 보다 근원적인 것을 계시하는 신령(神靈)한 증상으로 여겨졌다. 이런 인식이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광인은 별다른 제약 없이 일반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었다. 예술가 중에는 광기를 통해 천재성을 발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결과로 ‘근면’이라는 노동윤리가 생겨나고, 이에 따라 근면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구원의 증표로 여기는 부르주아 사회가 등장하면서, 노동을 외면하고 가난에 빠진 사람들은 가차 없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나태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한 부적응자가 됐다.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의 교과서라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출간된 배경이다. 이런 변화로 인해 서구 자본주의사회는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정상인’과 ‘비이성적이고 반사회적인 비정상인’으로 구분 지어, 후자를 철저히 타자(他者)화하고, 좀비화했다. 

실제로 근대에 들어 유럽 각국은 대대적으로 구빈원을 설치해, 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 가뒀다. 감금 대상에는 광인뿐만 아니라 극빈자, 거지, 부랑자, 방탕아, 매독환자, 무신앙자, 동성애자 등이 총망라돼 있었고, 그들은 모두 ‘같은’ 부류로 여겨졌다. 현대에 들어, 주목할 만한 점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그들의 취향과 경향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광인이나 부랑자가 아닐지라도 ‘비이성적이고 반사회적인 비정상인’으로 규정되고, 수시로 감금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처럼, 우리 사회에 조현병자(일명 정신병자)의 범죄가 유난히 빈번하다. 촛불혁명이 시작된 지 3년, 시민들의 바람대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과연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걸까? 이미 청산됐어야 할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정상인으로 군림하며,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현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적이다. 미쳐가는 비정상적 세상에서 미치지 않은 이가 있다면, 그건 멘탈이 무척 강한 사람이거나 비정상적인 광인일 가능성이 크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미쳐야 할 때 미치는 솔직한 존재감. 어쩌면 21세기의 데카르트는 조커가 아닐까?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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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희 2019-11-13 19:20:44
"우리 사회에 조현병자(일명 정신병자)의 범죄가 유난히 빈번하다." 는 표현이 장애인 비하 발언이
아닌지요? 필자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독자 중에 그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더ㅓ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