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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는가?
왜 나는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는가?
  • 최배근 l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 승인 2019.10.31 15: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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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여의도 검찰개혁 촛불문화제’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을 위한 국민퇴임식’이 진행됐고, 필자는 조국 교수의 법무부 장관 퇴임에 대한 뒤늦은 헌사를 발표했다. 현장에서 헌사를 들은 사람들은 ‘헌사’가 울림을 주는 ‘헌시’였다며, “경제학자가 아닌 국문학자(시인) 같았다”는 칭찬(?)을 건넸다. 

평소 국민들에게 통계수치를 중심으로 경제 관련된 ‘팩트체크’를 해주던 전형적(?)인 경제학자인 필자는, 사실 올해 7월부터 “역사학자 혹은 정치학자 같다”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일본이 올해 7월 1일, 반도체 등과 관련된 3개 핵심 소재 및 부품들에 대한 수출규제를 발표하자, 필자는 방송에서 “일본의 경제 도발은 한국에 친일정권을 수립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자의 이런 발언에 대해, 일부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안목을 가진 경제학자”라는 칭찬(?)을, 또 다른 일부는 “경제학자가 뭘 안다고 정치적 해석을 하냐”는 핀잔을 던졌다.

그런데 수십 년간 경제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역사·철학·정치·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필자로서는, 경제학자의 인문학적·역사적·정치적 소양을 예외적으로 생각하는 세태가 오히려 낯설다. 모든 이들이 공감 능력을 요구받는 가운데, 특히 지식인은 시대 및 대중과의 공감 능력을 더욱 요구받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침략과 조국 사태

2017년 문재인 정부는 국민과 국가의 생존위기 상황에서 출범했다. 박정희 모델의 수명이 소진한 결과, 우리 경제는 2016년 말 ‘중산층의 저소득층화 및 저소득층의 빈민화’가 진행될 만큼 파산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또한, 미·중 패권경쟁과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는 전쟁위기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대응하는 한편, 평창올림픽을 계기 삼아 극적으로 한반도를 전쟁위기에서 화해 분위기로 반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야당, 보수언론, 반공에 기생하는 종교세력 그리고 (한반도 해빙무드로 동북아에서 소외된) 일본 등은 입지가 매우 취약해졌다. 국내 세력들은 고용과 가계소득 지표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며 비판의 칼날을 기승전-최저임금, 기승전-소득주도성장 정책에 겨눴고, 일본 군국주의 세력인 아베 정권은 북·미 간 화해무드에 끊임없이 어깃장을 놓아왔다. 

올해 7월 일본 경제침략과 조국 사태의 연관성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면 명확해진다. 필자는 일본 경제침략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에서, 그리고 조국 수호 및 검찰개혁을 위한 촛불문화제에서 일관된 메시지를 보냈다. 특히 ‘조국 법무부 장관을 위한 국민퇴임식’에 받친 헌사에서 필자는, 검찰 독재의 뿌리는 군부독재이고 군부독재는 분단의 산물이며, 분단은 식민지 지배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검찰개혁은 ‘국민 위에 누구도 군림할 수 없는 나라 만들기’인 제2민주화운동이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만들기’인 제2독립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수백만 시민들이 검찰개혁과 조국 수호를 분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조국’은 좋든 싫든 더는 개인이 아닌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민정수석 시절에는 일본 경제침략에 대한 정부 입장의 창구 역할을 간접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분단, 군부독재, 검찰 독재 등이 청산돼야 하는 이유는 이들이 반인륜적이고,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반평화적이고, 반문명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생을 학생들과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광장에서 필자가 마이크를 잡은 이유는 우리 아이들에게 인간적인 사회, 평화적인 사회, 문명적인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는 인권, 민주주의, 평화, 문명을 유린하는 검찰의 야만적인 행위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반교육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침략 과정부터 검찰개혁 과정까지 많은 지식인들, 특히 적지 않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대중(시대)과의 소통에 실패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실망의 대상으로 전락한 모습을 필자는 목도했다. 필자는 그 원인이, 지식인들의 공감 능력 부족과 시대에 대한 치열한 인식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촛불 시민들을 ‘조빠’니 ‘중우정치’니 ‘파시즘’이니 ‘진영논리’니 하고 비아냥거리며… 이런 지식인들에게 대중은 ‘국민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사실, 박근혜 탄핵 촛불혁명 과정부터 지식인과 대중의 위치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민이 방향을 정확히 판단해 움직이고, 지식인들은 뒤늦게 참여하고 사후적으로 현상을 해석하기 급급한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와 달리 대중의 특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기술 변화로 가능해진 이른바 ‘집단지성’이 계속 진화 중이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은 이미 웬만한 전문가들의 역량을 넘어섰다. 

게다가 전문가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들은 자칭 보수나 진보 지식인들 모두가 겪고 있다. 첫째는 ‘지식의 식민지성’에서 비롯한 위기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식 오퍼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외국인의 눈과 언어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이 다를 때 현실을 문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 중에 ‘지식 사대주의’가 심각한 사람들은 똑같은 문제 제기를 한국의 동료 지식인이 지적하면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해외에서 지적하면 대단한 분석인 양 그 주장을 인용한다. 오죽하면, 허울 좋은 학력으로 요란하게 겉치장한 많은 전문가들이 대중으로부터 “미국 사람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을까? 

두 번째는 시대 변화에 따른 패러다임(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인식체계-필자 주)의 수명 소진에 따른 위기다. 지금 인류사회는 ‘근대’라는 낡은 세계의 막을 내린 지 오래고,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는 도래하지 않은 이행기라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의존하는 대부분, 아니 모든 개념이 근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 결과, 해체 중인 근대의 질서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근대의 패러다임과 탈근대의 미스매치가 지식인들을 위기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현상들에 기초한 개념으로 변화된 세계를 바라보다 보니 헛발질을 하게 된다. 

 

‘검찰 대변인’을 자청하는 그들

‘조국 사태’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두 가지 허구성을 드러냈다. 첫째, 이들은 “왜 조국을 수호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며 시민들의 검찰개혁 운동을 방관했다. 이들은 조국은 위선자라는 것이고, 조국이 아니어도 검찰개혁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조국이 고위공직자 의무를 어겼을 가능성(?)을 들어 반대하는 논리는 수구언론이나 검찰, 자유한국당 등의 논리와 판박이다. 마찬가지로 김어준 뉴스공장이나 KBS, MBC 등에 출연해 검찰 논리를 반박하는 출연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자청해’ 검찰 대변인 역할을 하는 모습은 측은하기조차 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은 ‘신자유주의 행동 윤리’라는 해괴한 용어까지 동원한다. 즉 ‘신자유주의 행동 윤리’를 철저하게 실천한 조국은 변칙적 행동들을 통해 개인의 잇속만 채운 반공동체적이고 반윤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런 논리가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자신들이 말하는 ‘진보’의 삶의 윤리가 완전무결한 인간의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족까지 달며 방어막을 치려고 몸부림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희생’을 겪으며 살아간다고 자화자찬까지 한다. 조국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치른 ‘희생’은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이들 자신과 가족, 주변인들을 조국 기준으로 털 때, 이들이 비판하는 ‘신자유주의 행동 윤리’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르겠다. 도대체 신자유주의 행동 윤리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하고, 그 기준이 무엇인가? 자신 삶의 미세한 흔적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탈탈 털려본 후 말하기를 바란다. 조국처럼 공직에 나갈 능력(?)이 안 되니 털릴 일이 없다는 배짱으로 허세(?)를 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개전쌍전(個全雙全)’을 말했다. 개인의 삶과 사회는 동시에 완성된다는 말이다. 사회가 완성되기 전에 개인의 삶이 완성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인류사회가 지금껏 (기회의) 공정성이 완벽하게 실현된 적이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어느 사회에서 ‘합법적 불공정성’이 없던 사회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는가? 드물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필자는 개인적으로 직접 목도한 것이기에 그런 이들의 삶을 잘 안다. 그런 삶은 가족 등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지속 불가능하다. 사회가 온전해질 때까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삶을 2대 이상 경험한 이들에게 ‘희생’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본다.

 

‘지식의 식민지성’부터 청산해야

둘째, 이들은 “조국 아니면 검찰개혁이 불가능하냐”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검찰 독재의 역사와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온 것이다. 검찰개혁은 현행법 내에서 가능한 부분과 법을 변경해야만 가능한 부분이 있다. 재벌개혁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현행법에서 할 수 있는 부분도 추진되지 않았고, 조국이 장관 시절 35일 만에 이를 궤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비입법 개혁 과제 추진을 막으려고 검찰이 가족을 인질 삼아 협박한 사실을 정말 모른다면, 너무나 순진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권력→ 군부권력→ 재벌-검찰-언론 권력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군부독재가 청산된 후 <재벌-언론-검찰>의 특권 카르텔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군부독재를 계승하는 정치세력이 이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영역을 인정해주면서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법 위에 군림하고, 퇴임 후에는 한 해에 20~30억을 벌 수 있는 전관을 누리는 검찰의 특권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검찰은 이런 특권을 묵시적으로 보장받는 대신, 재벌과 언론 사주에 대한 사법적 특혜도 보장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검찰 권력은 분단구조에서 형성된 특권의 일부이고, 군부독재에서 형성된 재벌과 일란성 쌍둥이이며, 분단과 반공에 기생하는 수구언론 및 종교권력과 이해를 공유한다. 군부독재의 정치적 후예들 및 분단과 반공에 기생하는 수구언론과 종교집단 등이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단일 대오를 형성한 배경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배경은 검찰개혁이 제2민주화운동이자 제2독립운동인 이유다. 그리고 일본 아베 정권이 조국 사퇴를 보며 웃음을 짓는 이유다. 

문제는 일부 얼치기 진보 지식인들이 이런 검찰을 두둔하고 있으니 얼마나 코미디인가? 검찰 및 사법 적폐 문제보다 노동해방 및 재벌개혁 등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이들의 논리는, 대중에게 얼마나 우습게 들리겠는가? 대중들이 볼 때 검찰을 두둔하는 이들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데, 이들이 오히려 대중을 중우정치의 희생물로 여기며 대중들을 가르치려 드니, 대중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이런 진보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조국이 사법 처리되는 것을 기대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대중이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박근혜 재옹립 세력과 목표가 같아져도 개의치 않는 역사적 반동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부 진보 지식인들에게 필자가 안타까웠던 점은 결정을 하기 전에 촛불 문화제에 나온 대중들을, 최소한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졌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들 지식인은 자신을 너무 과신한 것이다. 내가 광장에서 만난 대중들 중에는 먼 지방뿐만 아니라 영국, 캐나다, 미국 등 해외에서 힘들게 시간을 내서 오신 분들이 여럿 있었다. 필자를 유튜브로 봐온 분들과는, 반갑게 인사를 교환하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해외에 살면서도 조국에서 일어나는 조국 사태의 문제와 검찰개혁 필요성에 대해 이들이 얼마나 공감을 했기에 어려운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고 돌아가는지, 이들 진보 지식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할 마음도 없어 보인다. 

이런 자세는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 세상과는 담벽을 쌓고, 시대 변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지식인은 더 이상 사회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국 사태는 오퍼상 수준에 불과한 ‘관념좌파’의 실체를 커밍아웃시켰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런 커밍아웃은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했을 때인 1990년대 초부터 반복됐다. 제2의 민주화운동이자 제2의 독립운동인 검찰개혁 과정에서 지식의 식민지성이 실체를 드러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지식의 식민지성’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우리나라와 아이들은 희망과 미래를 만들 수 없다. 내가 강단이 아닌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유다. 

 

 

글·최배근
미국 조지아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안 경제의 이론과 시스템 문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교육·지역자치·통일운동 분야의 사회활동에도 관심이 높다. 현재 경제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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