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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의 문화톡톡] ‘O리단길’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
[성일권의 문화톡톡] ‘O리단길’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
  • 성일권(문화평론가)
  • 승인 2019.11.1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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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에 대한 단상

망원동을 사랑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감스럽게도 영화 <추격자>에 호의적인 평가를 주고 싶지 않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모티브로 제작한 이 영화의 살인현장이 망원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유영철이 범죄를 저지른 곳은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이며, 영화 촬영지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망원동은 전혀 연관이 없다. 주민들은 영화가 망원동의 이미지를 훼손했다고 주장하며 항의에 나섰다. 왜 하필 망원동? 나홍진 감독은 망원동을 서른이 넘어서 처음 들었다. 존재하는데 존재를 모르고 있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망원이라는 글자로 연상되는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감독이 망원에서 무엇을 연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 망원동은 한강변 정자인 망원정에서 유래한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정자에 오르면 멀리 산과 강을 잇는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영화 추격자
영화 추격자

중장년층에겐 망원동은 노아의 대홍수로 기억된다. 1984년 집중호우로 한강이 넘쳐 유수지 수문이 붕괴되고 수천가구의 수재민이 발생했다. 반지하층은 물론 1층까지 물에 차서 자동차들과 강아지가 둥둥 떠다니고, 주민들이 조각배와 튜브를 타고 대피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 망원동은 풍납동과 함께 큰 침수피해를 입었다. 이후 침수방지 시설이 갖춰졌지만 비만 오면 망원동은 침수우려지역이라는 오명을 썼다. 그러나 물가가 싼 망원시장과 전월세가 싼 빌라촌이 있어 사람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몇 해 전 보컬그룹 장미여관의 육중완과 코미디언 박나래는 MBC<나 혼자 산다>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망원시장을 누빈 뒤, 망원동은 망리단길이라는 그럴듯한 젊은이들의 순례길이 되었다.

회사로부터 지근거리에 망리단길이 있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특별한 동네로 떠올라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제법 잦은 곳이다. 눈길을 끌만한 연극무대나 음악당 같은 곳도 없고, 극장이나 클럽이 없는데도 젊은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점심때가 되면 웬만한 식당들엔 맛집 순례자들이 길게 줄지어 있고, 저녁때가 되면 술손님들로 새로운 활기를 띤다.

 

망리단길 인근의 망원시장
망리단길 인근의 망원시장

골목상권의 원조로 불리는 이태원 경리단길이 인기를 끌자, 내가 거의 매일 지나는 이 곳 망원동 망리단길을 비롯해, 연남동 연리단길’, 송파동 송리단길등이 잇따라 ‘O리단길'의 이름을 얻으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지방도 마찬가지여서 경주 황리단길’, 전주 객리단길’, 부산 해리단길등이 인기를 끌었다. 불과 4~5년 만에 전국에는 20여곳이 넘는 ‘O리단길이 생겨났다. 사실, 이들 거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기보단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왔을 뿐인데, 다만 젊은이들이 이를 재발견해 그들의 방식대로 닉네임을 붙인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동네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태어나고 자란 빌딩숲의 울타리를 벗어나 부모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이 이끄는 대로 자신들의 동네를 찾는다. 그들이 찾는 동네에는 우선 서로 인사를 건넬 이웃들이 있고, 늘 똑같은 사람들이 있으며, 식당과 술집, 잡화점, 빵집, 휴일에도 문을 여는 담뱃가게, 약국, 우체국, 그들이 단골이거나 적어도 꾸준한 손님으로서 주인이나 바리스타와 인사를 나누는 카페가 있다.

동네는 조르주 페렉의 말대로 무정형(無定型)의 어떤 것이다.(1) 프랑스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동네(quartier)는 한 구(arrondissement)4분의 1에 해당되며, 주민들 대부분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마을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의 경우 너무나 비대해져 한 구의 인구가 수십만 명에 달해 더 이상 동네다운 동네가 존재하지 않지만, 젊은이들은 시멘트 바벨탑 너머의 어떤 동네에서 지치고 힘든 자신들을 위로받고 싶어한다. 젊은이들이 꿈꾸는 유토피아적 동네는 딱히 정해진 형태가 없다. 강남 도심지의 공간이 반듯한 대로(大路)로 구획되고, 아파트이건, 복합주상건물이건, 그곳 건축물들이 딱딱한 골조와 차가운 시멘트로 이뤄진 직사각형 형태라면, 젊은이들의 유토피아적 동네는 무정형적이다. 시작과 끝이 없는 꼬불꼬불한 골목길,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밴 낡은 건물들, 조금만 까치발을 세우면 뜰 안의 감나무 가지가 잡히는 낮은 담벼락과 그 위로 타고 올라간 장미꽃과 이름 없는 꽃들, 낯선 행인에게 꼬리 흔들며 반기는 강아지와 꼬리세우며 염탐하는 길냥이들. 폰 카메라를 손에 쥔 젊은이들에겐 이모든 게 기억하고 공유하고 싶은 예술의 대상이다. 젊은이들이 찾는 동네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같은 그들의 SNS 계정에서 거듭 태어나기도 하고, 뒤로 밀리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흔히 전문가들은 ‘O리단길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동네 순례를 골목상권’, 또는 핫플레이스라고 표기한다. 동네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음식 맛 외에 디자인이나 창의적인 콘셉트를 살린 카페식당들이 조성되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젊은이들을 유혹하기에 충분치 않다. 동네 특유의 특징이 담겨있어야 한다.

 

포털에 오른 망리단길의 맛집들
포털에 오른 망리단길의 맛집들

어느 동네가 급부상하는 동안 다른 동네가 소리소문 없이 가라앉는 것은 처음부터 이곳엔 젊은이들의 유토피아적 미덕을 갖고 있지 않은 탓이다. 서울에서는 송리단길, 익선동, 성수동 등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는 반면에 삼청동과 북촌 한옥마을, 경리단길 등은 어느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문가들은 잘 나가던 리단길의 쇠퇴엔 높아진 임대료라는 공급 측 요인과 젊은층의 유행 급변이라는 수요 측 요인이 맞물려 있다고 지적하지만, 어쩌면 젊은이들의 유토피아적 꿈은 다른 곳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들이 항상 같은 카페에 가고, 그들의 취향을 잘 아는 바리스타가 샷 2개를 추가하고, 편의점에 소포를 맡기고, 식당에 외상장부를 열고, 약사와 의사를 이름으로 부르고, 서점주인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담벼락에 삐죽 나온 가지에서 감과 대추를 슬쩍 따먹고, 뛰 노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것, 젊은이들이 찾는 시멘트 바벨탑 너머의 유토피아적 동네에서는 어쩌면 이 모든 것, 또는 그 어떠한 것도 실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O리단길을 또 찾아나선다. 수년전, 갑작스럽게 급부상한 동네 인기로 임대료가 급등하자, 망원동 주민회는 망리단길 싫어요서명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예전처럼 따뜻하게 살고 싶다는 표현이다. 반짝 뜨겁다가 식고 마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오래토록 한결같은 동네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망원동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선 이곳만의 고유한 스토리텔링과 사람냄새가 가미되어야 한다. 그게 어디 망원동 뿐이랴!

이제 단풍이 드는 늦가을이다. 자본의 상술이 빚어낸 ‘O리단길의 유토피아적 환상에서 벗어나, 카메라 폰을 들고 동네다운동네의 순례자가 되어 계절마다 달라지는 옛 동네의 색채와 정취를 담아보는 것은 어떨지

 

(1)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2019)

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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