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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코로나, 격리의 방역을 넘어 공존의 휴머니티로
위드 코로나, 격리의 방역을 넘어 공존의 휴머니티로
  • 이만우 l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원 상담·코칭지원센터 외래 임상교수
  • 승인 2021.10.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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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라고 명명된 코로나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삶을 기획 및 준비할 시점이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의 정치철학적 의미를 파악해 현재의 감염병 위기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정부나 국민들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집에 있어라!”였다. 이 명령은 4단계 거리두기가 실행되면서 갑작스럽게 모든 시민들에게 내려왔다. 이는 중국 우한에서 시행된 ‘가혹한’ 방역도, 유럽의 ‘계산된’ 방역도 아닌 ‘자유로운’ 방역에 가깝다. 정부는 시민들이 집에 머물도록 ‘권고하는’ 봉쇄를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자발적 예속, 봉쇄의 정당성

놀라운 점은, 국민 일부가 여름휴가와 추석 연휴를 위해 이동을 계속했다고는 하지만, 대개는 저항 없이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이는 감염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일종의 ‘시민성’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머물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시민권자들의 ‘세련된 태도’로 인식됐다. 이런 순응성은, 방역상황 속에서 ‘자발적 예속’의 ‘사회적 의례화’를 의미한다.

거부는 우익 종교단체 등 시민사회의 변두리에서만 이뤄졌다. 일부는 이런 거부를 ‘책임감 있는’ 집단연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거부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반대하는 투쟁의 신호, 즉 민중연대의 ‘공론장’으로의 복귀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이 기본권 제한을 신속하게 수용하는 것,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방역 조치의 대상으로 삼는 기현상에 대해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봉쇄 조치에 부여된 정당성은 곧 ‘감염 곡선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한 전국적인 ‘비상사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국가의 기본 운영원리를 규율하는 헌법에 입각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법률가들이 있었지만, 헌법이 그런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예외 상태’를 선언할 권한을 정부에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국가의 이런 능력 이면에 있는 정치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려는 노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국민주권을 규율한 헌법이 국민에게 보장한 기본권에 대한 일종의 ‘권리 강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국민에게 모든 공공집회를 금지하고, 밤낮으로 실내에 머물게 하며, 식사 집합도 제한하고 이동(출국 포함)을 위해 특별 조건을 요구하는 것 등은 방역의 필요성이 헌법을 ‘침묵’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긴급하고 명확한 현재의 위험으로 인해 국가는 위협(코로나 바이러스)이 소멸될 때까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의 일부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는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공권력으로 국가 주권을 정의했다. 이것은 모든 입법권이 신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주의 손에 집중돼 있다는 주장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그는 국가 주권을 국가에 의한 국민의 ‘권리 강탈’ 능력과 등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미셸 푸코는 그런 ‘권리 박탈’을 ‘국가 이성’으로 알려진 현대 지식국가의 ‘통치 기술’로 분석해, 개인의 권리 보호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국가 이성’을 위한 정부의 최고 목표는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고, 정부가 이 목표를 달성하는 최적의 수단은 국민에게 안녕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에게 국민의 ‘권리 박탈’은 사회적 자원이 (권리 주체로서의 국민이 아닌) 국가를 위해 동원되도록 정부가 국민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의 긴급성과 방역의 필요성을 확인시키는 통치수단인 셈이다. 그가 말했듯, 국민의 “권리 강탈은 국가가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재 이유(Raison d'être)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권리 강탈’은 홉스가 말한 국민주권에 대한 격언(즉, “국민 안전은 궁극적으로 법률에 따르게 하라!” Salus populi ultima lex esto)을 거부하는 셈이다. 방역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결국 정부의 국가권력 강화를 위한 정당화의 근거가 돼버린 셈이다. 

“코로나19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권리 강탈’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진단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줬다. 국민의 ‘권리 강탈’에 대한 그의 진단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권리 강탈’의 목적과 관련하여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에 대한 궁극적인 중재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그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그는 ‘권리 강탈’의 목적을 푸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슈미트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권리 강탈’은 국민 안전을 위한 국가의 정당한 권력행사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강화를 위한 일종의 통치수단일 뿐이다. 

정부는 ‘방역 주권’이라는 명목 하에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킬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가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은 국민이 아닌 국가이며, 특히 국민의 ‘권리 강탈’은 국가의 현존 의료자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때문에 국가 보건의료체계가 붕괴된다면, 국가권력의 강화, 국가의 보호는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번째 국가의 명령은 “의료자원을 보호하라!”다. 이 명령에 담긴 ‘보호’의 의미는 국민 안전이 핵심인 홉스의 국민주권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의료자원을 보호한다는 것은 우리가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국가권력은 지속적으로 강화돼야 하는 것이다. 푸코가 그 유명한 파리 대학의 강연 <안전, 영토, 국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것은 “권력은 국민을 목표로 하고, 정치경제는 그 주요 형태로 지식을 가지며, 국민 안전 역시 그 필수적인 기술 도구로 가지는” 국가통제 사회가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 안전’에서 국가의 ‘의료자원 보호’로의 전환은 매우 놀라운 것이며,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접어들어 국가권력의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나타낸다. 생명을 ‘지키는’ 권력으로부터 생명을 ‘선택하는’ 새로운 ‘생체권력’으로 국가권력의 성격이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제어하기 위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위드 코로나’ 정책 시행과 관련해 가장 명확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위드 코로나 정책은 생체권력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부의 통치기술이 ‘생명정치’를 공개적으로 실현시킬 것으로 생각한다.

 

생명을 구하라, 생계를 구하라!

그렇다면 세 번째 명령은 “생명을 구하라!”임을 알게 된다. 정부는 감염 환자의 증가에 압도돼 음압 병상과 인공호흡기가 있는 병상이 부족한, 끔찍한 악몽같은 위험으로부터 의료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의 ‘권리 박탈’을 행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관점에서 이 비극은 법 앞에 시민의 평등한 지위를 구현하는 국민주권의 실패로 기록되지 않는다. 실제로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치료 및 돌봄을 받기 더욱 어려워진 이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욱 치명적이라는 점, 즉, ‘생명의 차별화’ 현상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

이 비극은 주로 국가가 안전을 제공하는데, 즉 국민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미약하다는 증거로 남는다. 따라서 “생명을 구하라!”도 현존 “의료자원을 보호하라!”로 치환할 수 있다. 국가의 역할은 국민에게 ‘추가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는 포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존해 일상을 회복하고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보호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될 때부터 일부 경제학자들은 ‘생명을 구하는 것’과 ‘생계를 구하는 것’ 사이의 대안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봉쇄의 ‘경제적 비용’을 강조했고, 또 그들 일부는 경제를 다시 ‘개방’해야 할 때의 딜레마를 통계적 계산으로 공식화했다. 즉, 일자리 손실 측면에서 노인과 장애인 등의 생명을 구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평균적으로 국민의 ‘생계’가 얼마나 위축되는가, 그리고 이런 비용 지출이 경제적 가치가 있는가 등의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이 결코 진정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진정한 대안 형성은 ‘개인 안전’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이해되는 ‘국민 안전’, 즉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국민 전체의 안녕을 위해 현행 사회보장제도 전반의 재구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의료자원 보호에 대한 정부의 노력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시작부터 경제적 차원에서 동기화돼 있었지만, 그 동기는 ‘권리 박탈’과 긴급명령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들어가던 ‘국가통제’를 소생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통제로의 회귀는 세 번째 명령인 “생명을 구하라!”의 모호성에 요약돼 있다. “생명을 구하라!”는 우리에게 국가통제의 근본적인 기능을 상기시키는 바, 경제적 취약계층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인한 생계위협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방역이 국가적 재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 즉 국가통제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구하라!”의 실제적 의미는 “생계를 구하라!”, 즉 ‘경제적 생명권의 확보’다.

실제로 국가통제로의 회귀는 국민 안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관한 것이자 경제적 취약계층의 생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유도한 ‘잠’에서 국가권력을 깨우는 ‘은유’라고 볼 수 있다. 국가는 이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엄청난 부채를 떠안으면서 국민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안전논리는 결국 경제논리다. 생체권력은 항상 엄청난 비용을 치르면서 행사된다. 국민 안전에 재원을 조달할 수 있는 집단 행위자만이 경제를 유지한다. 이 행위자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최후수단으로서의 생체권력이다. 개인의 건강에 대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지속적인 위협 속에서도, 생체권력은 경제활동의 재개를 추동하고 국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경제운영의 시장 메카니즘의 작동보다는 일회적 비상조치의 정치게임(재난지원금, 국민지원금, 기본소득 등)을 우선시했다.  

정부는 앞으로 적극적 백신 투여를 통해 집단면역이라는 ‘약속된 땅’에 도달하기 위해 경계 유지, 바이러스와의 공존, 생명 구하기(중증화 예방 및 중증 환자 치료) 등으로 국가의 명령(‘위드 코로나’)을 변경할 것이다. 국민 안전에 대한 이런 새로운 해석이 일부 정치인들이 경고했듯, 국가 분열의 위험이 있는지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경계 유지는 바이러스 확산을 억제하기보다는 감염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방역의 기존 메시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바이러스와의 공존을 이해하기 어렵고, 결국 혼돈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위드 코로나'라는 새로운 ‘방역(!)’ 명령은, 코로나19 팬데믹의 결과를 통해 우리의 안녕에 대한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게끔 한다.

 

‘인간됨’은 무엇인가,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현재 특별한 감염병 위기에 직면한 우리는 ‘인간됨’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감염병이 우리를 위협해 우리의 유적 존재(Species-being)가 배제될 때 우리 스스로 ‘인간됨’의 회복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격리함으로써 생체권력의 작용으로 내려오는 국가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다면, 그 명령과 ‘인간됨’의 갈등과 균열을 어떻게 봉합할 것인가?

일찍이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과학과 진리』에서 (주체의 추론 과학이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과학’에 거부감을 표현하며, 그것은 인간 주체들을 ‘예속의 부름’에 따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라캉은 우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의 방역 명령을 거부하든, 따르든 우리는 분절되고 고립돼 홀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하튼 방역 명령은 결국 ‘인간됨’의 회복 문제를 낳는다.

갑자기 지평선에 비치는 희미한 빛처럼 ‘연대’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연대가 감염병의 위기로 상처받은 ‘인간됨’을 회복하는 방법일까? 많은 철학자들, 또는 인문학자들은 현 위기에 대한 인간학적 대응으로 연대를 강조한다. 연대는 위기와 파국에 대처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최선의 대응이라고 한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형성됐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앞으로도 남겨지거나 사라질지도 모를 인간 주체들의 ‘유기적 연대(대상관계의 상호작용)’는 ‘인간됨’의 회복과 관련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정부는 ‘예외 상태’를 국가의 정상 패러다임으로 고착시키려 할 것이고, 모든 종류의 디지털 정보통신기술로 구동되는 네크워크를 구축해 ‘예외’를 실재화하는 규칙이 지속적으로 마련될 것이다. 이것은 바이러스의 팬데믹일 뿐만 아니라 생체과학적 디지털 네크워크의 ‘팬데믹’이다. 정부는 디지털 네트워크 작동의 최종 집행자일 뿐이고, 앞으로는 이에 대한 비판적 반성보다 정치적 책략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예외’가 ‘인간됨’을 가로질러 보편화되어 인간 주체들의 유적 존재를 배제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지한다면, 네크워크의 ‘기계적 연대’와 대인관계의 ‘유기적 연대’ 사이 긴장이 더욱 필수적임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감염병 위기를 극복한 후에야 ‘인간됨’을 회복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 너머(Jenseits)’에 대한 분석작업을 거부하고 ‘지금 여기(Jetzt und hier)’에서의 분석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방역의 계산된 국가통제에 맞서 특권화된 ‘신탁 관리자’의 거짓을 폭로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인간됨’을 회복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선, 방역의 필요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방역의 절대성만을 추구하는 ‘포퓰리즘적 환상’은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국가통제를 일상화해 방역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갈 것이다. 방역은 ‘절대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의 ‘상대물(Counterpart)’을 인정하고 재구성하도록 시행돼야 한다. 방역상황에서 ‘절대적인 것’을 복수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방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생계에 방역을 맞춰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방역이든 생계든 그 각각이 작동·보장될 수 있는 조건들을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방역과 생계는 서로의 ‘상대물’이기 때문에 상호 맞물리는 ‘지점’을 포착해 이를 정책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향후 전개될 ‘위드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와의 공존하는 방역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야기하거나 증폭시킨 학력과 소득의 격차, 고용과 숙련의 축소, 그리고 돌봄과 소통의 결핍 등 현존 위기에 대응하는 기존 사회정책의 수단을 적절하게 동원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디지털 네크워크의 기능적 집행자로 황폐화된 ‘인간됨’ 회복의 길로서 방역의 일상생활에서 시민들 간의 구체적인 유기적 연대를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유기적 연대는 국가통제의 반작용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조직화해야 가능한 것이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망에 편재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조직화하려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야기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사회보장정책을 새롭게 구상해 시행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재난지원금 등 각종 임시적 수당 지급만이 아니라 기본소득과 기존 소득보장제도와의 연계 및 사회보험제도의 재편 방안 등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지역사회 돌봄 등 사회서비스 제공을 체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시민들 사이 소통 미흡한 사회관계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글·이만우
사회학 박사이자 정신분석학자로서 임상실천의 이론·방법에 기초해 일상생활과 문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글쓰기를 수행해왔으며, 현재 정신분석학과 사회정책을 연계해 건강과 의료 및 복지와 여성 등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분석적 글쓰기를 기획·실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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