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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시민이 이 시대의 독립군
깨어 있는 시민이 이 시대의 독립군
  • 최성주 l 최운산 장군의 후손, 시민운동가
  • 승인 2023.09.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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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독립운동을 아느냐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는다. 30년 넘는 세월을 시민운동가로 활동하며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실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믿음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퇴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역사의 눈으로 보면 그래도 세상은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언론 영역에서 오래 활동하고 있어 미디어가 분화·발전하며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일에 예민하게 대응하느라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만큼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이 너무 자주,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달려가는 현 정부의 행태에 하루하루가 힘겹다. 해답을 찾지 못하는 여야의 정치 상황까지 바라보자니 지난 1년이 마치 10년 같았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블랙홀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나날이다. 

일제 군국주의의 상징 욱일기를 단 일본 군함이 부산항에 입항할 때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우리 군이 ‘일본해’라 적힌 군사지도로 훈련하고 일본자위대의 통제를 받으며 한·미·일 연합훈련을 한다는 소식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역사 퇴행과 친일매국 행위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해상 방류해 우리 먹거리에 비상이 걸려도, 대한민국 정부는 방사능 위험을 걱정하는 국민을 괴담 유포자로 몰고 혈세를 들여 일본 입장을 홍보하고 있다. 

논란으로 논란을 덮으려는 의도일까? 핵폐수 위기로 가슴앓이하는 국민 앞에 대한민국 군인의 사표로 삼기 위해 육사에 설치한 독립투사들의 흉상을 철거하겠다는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독립투사 대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을 들먹인다. 독립투사 홍범도와 백선엽의 이름이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모욕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첫 군대 ‘군무도독부’, 국내진공작전 감행

나는 북간도 봉오동 신한촌을 무장독립군기지로 개발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봉오동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최운산 장군의 손녀다. 증조부 최우삼은 조선시대 말기 간도에서 조선인을 보호하기 위해 청나라와 무력충돌하며 국경분쟁을 감당했던 연변 도태(관리사)였다. 조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병력의 열세로 패했고, 온 가족이 고난을 겪었다. 정의로웠던 아버지 최우삼의 선택을 존경한 아들들은 민족정신을 잃지 않고 현실의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했다. 중국이 황무지였던 북간도 지역의 토지를 정리할 때 왕청현 봉오동 일대의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게 된 최운산은 성실한 경제활동으로 간도 제일의 거부(巨富)가 됐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북간도 연길에서 태어나 중국어에 능통했고 뛰어난 무술 실력과 사격술로 청년 시절 중국군에서 군사훈련을 담당했던 최운산은 중국 측의 양해 아래 봉오동에서 사병부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횡행하던 마적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군 양성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봉오동으로 모여든 애국청년들은 ‘봉오동사관학교’에서 정예 독립군으로 성장했다. 1915년 병사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봉오동 숲을 개간해 삼천 평 규모의 연병장을 만들고 베어낸 나무로 900평, 800평, 500평의 대형 목조 막사 세 동을 지었다. 그리고 본부 둘레에 폭이 1m가 넘는 토성을 건축했다.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가 건설된 것이다.

평소 잘 훈련된 군대라야 유사시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최신 성능의 무기를 실전에서 잘 다루기 위해서는 사격훈련과 매일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충분한 영양공급과 체력관리, 정신무장을 위한 학습과 교육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나라를 잃고 목숨을 걸고 싸우던 독립군에게도 꼭 필요한 훈련과 교육이었다. 북간도 봉오동에서 이것이 가능했다. 최운산 장군의 자금력이 봉오동 무장독립군기지 형성과 운영의 근거였기 때문이다. 식량과 군복, 무기를 공급받으며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봉오동은 독립군들의 해방구였다. 

1919년 3월 26일 북간도 왕청현 백초구에서 1,500여 명의 동포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했다. 이 독립선언식을 주관했던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본격적으로 독립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0년간 봉오동에서 양성된 최운산의 사병부대는 대한민국의 첫 군대 ‘군무도독부’로 전환·재창설됐다. 최진동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다. 참모장으로 군대 운영을 총괄했던 최운산 장군은 계속 늘어나는 독립군의 식량과 군복을 마련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체코군의 신형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한편 군무도독부는 국내 진공 작전에 돌입했다. 1919년 하반기부터 다음 해 봉오동 독립전쟁 발발까지 수십 차례 온성, 종성, 경성, 회령 등 두만강변의 헌병대와 국경수비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북간도 독립군의 실력과 기상을 바탕으로 상해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2년(1920년) 1월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했다.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독립군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봉오동으로 대량의 무기가 반입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이어졌다. 3월 19일 보고서에 “소총 500정, 탄환 5만 발, 권총 430정, 권총 탄환 5천 발, 기관총 2문 봉오동 도착”을, 4월 5일 보고서가 “소총 700정 봉오동 도착”을 알렸다. 1920년 5월 중국 측에 공식 서한을 보내 “봉오동의 부녀자들이 8대의 재봉틀로 군복을 만들고 있으며 천 명이 넘는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훈련 중”이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사병부대 시절부터 10년 이상 독립군의 먹거리와 군복 제작을 책임졌던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와 봉오동 부녀자들의 노고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군무도독부가 중심이 돼 북간도 독립군 통합에 박차를 가했다. 여러 차례의 회동 끝에 5월 5일 신민단, 군정서, 군무도독부, 광복단, 국민회, 의군부 6개 단체 대표가 모여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在北墾島各機關協議會誓約書)’를 발표했다. 개별 단체 모연대의 소환, 상호 강제편입 불허, 개별모금 반대 등을 약속하며 무장단체 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의회를 통해 서로 협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동안 독립군 모집과 군자금 모집에서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던 무장단체들이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힘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 봉오동 독립전투

이 간단치 않은 합의가 이뤄진 배경에는 무기와 식량 군복, 무기를 제공하겠다는 최운산 장군의 약조가 있었다. 치밀한 첩보 활동을 통해 전쟁이 임박한 것을 간파한 최운산 장군은 5월 중순부터 봉오동 상촌을 둘러싼 여러 산에 지형을 따라 교통호 형식의 참호를 파고 매복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봉오동 주민들은 모두 마을 밖으로 피신시켰다.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하기 위한 철저한 작전계획을 세운 것이다. 5월 19일 제일 규모가 컸던 대한군무도독부와 국민회가 통합해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서산, 남산 동북산에 각 중대별로 분산 배치되었다. 전쟁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 국민회에 소속되어 봉오동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도 연대장으로 봉오동전투에 참전했다. 사령관 최진동 장군과 참모장 최운산 장군을 중심으로 봉오동에서 대통합을 이룬 북간도의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단결된 힘으로 6월 7일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3.1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불린 봉오동 독립전투는 한일병탄 이후 시나브로 꺼져가던 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린 횃불이 됐다. 봉오동의 승전을 헐벗고 굶주린 독립군의 극적인 승리라고, 마치 신화처럼 설명하는 분들이 있으나 무기의 유무, 기술과 성능이 승패의 관건이 되는 현대전의 승리는 절대로 거저 얻을 수 없다. 봉오동 독립전쟁의 승전에는 10년 이상의 체계적 준비와 전투경험, 뛰어난 전술과 작전, 그리고 봉오동에 모여 목숨을 걸고 싸운 수천 독립군 선조들의 뜨거운 의지가 있었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약칭 극동민족대회)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50여 명이 대거 참석했다. 일제의 조선 강점에 대해 외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적 도움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영·프·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밀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워싱턴회의에서도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모를 겪은 뒤였다. 모스크바 대회에서 김규식 선생은 1920년의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 승전을 설명하며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빨치산이 서부 간도 지방에서 소대로 나뉘어 무장을 기도하고 있는 사이에, 북부 간도 지구 민중은 장래의 대규모 전쟁을 위한 준비에 집중적으로 종사하고 있었다. 전부 2개 사단의 완전히 무장된 강력한 일본군에 직면해 적어도 10회에서 9회까지 적을 철저하게 패주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시민운동가는 길이 없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많다. 나는 살면서 겪었어야 했던 어려운 순간마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삶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곤 했다. 우리 민족은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해방이 올 때까지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싸웠다. 나이 들면서 우리 무장투쟁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고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커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숙제 앞에 섰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지만 정치의 부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어진 몫을 사는 일이 우선이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눈떠보니 선진국이란 자부심이 매일 뒷걸음질 치는 경제지표에 내려앉고, 장기적 목표 아래 운영해야 할 국가 예산이 쌈짓돈처럼 낭비되는 것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오고, 정부가 비상식적으로 공적 기관을 장악해 언론자유를 억압하고 있지만 함께 저항하고 버텨내야 한다. 나라를 잃고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들어 걸었던 선조들의 노력을 불길 삼아, 곁불을 쬐며 이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 대한민국의 발전은 평범한 시민들이 어깨 겯고 함께 걷는 길에 있음을 잊지 말기로 하자. 이 시대의 독립군은 깨어 있는 시민이다. 

 

 

글·최성주
북간도 항일 무장투쟁의 주역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상임이사로 봉오동 독립전쟁 학술세미나 및 현장답사를 수차례 진행했다. 역사전문가들과의 학술연구를 통해 국내 최초로 전투 현장의 위치를 밝히는 등 봉오동 독립전투 승리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언론 분야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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