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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와 반전시위,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노센스’
제노사이드와 반전시위,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노센스’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4.05.3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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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해당한 아동의 시신보다 더 최악이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아들 시신의 남은 조각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운반하는 동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2023년 10월 17일) - 마젠 커바이

이스라엘의 무차별한 팔레스타인 주민 학살을 반대하는 반전시위가 지구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시작된 반전시위의 물결은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을 거쳐, 마침내 한국에까지 이르렀고, 세계 도처에서 대학생, 고교생, 교수, EU 직원들까지 가담해 한 목소리로 “더 이상의 죽음은 안돼!”를 외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EU) 직원 250여 명은 브뤼셀 EU 본부 앞에서 집회를 열어, 이스라엘이 저지른 민간인 참상과 전쟁에 대한 EU 집행부의 소극적 입장에 항의하고 가짜 피를 칠한 시신 형상물 위에 꽃을 바치면서 모의 장례식을 열었고, 침묵 행진을 이어갔다. 미국 등 각국 정부는 반전 시위대가 ‘친 팔레스타인-반 유대주의’ 성향의 과격 분자들이라고 비난하며 경찰력을 동원하고 있으나, 시위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는 양상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이처럼 눈덩이처럼 확산되는 것은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인종학살, 즉 제노사이드(Genocide)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돕고, 서구 국가들이 이를 따르는 데에서 비롯된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와의 전쟁에 돌입한 이후 7개월 동안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가 3만 4,683명, 부상자는 7만 8,018명에 달하며, 이곳 인구의 약 1.5%가 지워진 것은 명백한 제노사이드에 해당된다. 이스라엘은 과격 테러단체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보복 공격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부인하지만,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입장은 “제노사이드에 해당하는 살인행위를 당장에 중단하라”라는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특정 인류 집단을 고의적 및 제도적으로 말살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시도를 일컫는다. 1944년 폴란드 출신 법학자 라파우 렘킨이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자행된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규정지을 때 처음 사용한 제노사이드는 일반적인 학살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범죄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립되었다. 주로 특정적인 국민, 인종, 민족 또는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집단의 ‘절멸’ 이외에도 ‘민족적 거세’라는 목표를 설정하여 집단 성폭행을 조직적으로 자행하는 경우나 문화적으로 탄압하는 행위 등도 제노사이드로 판단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인종-민족 간 분쟁에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했다.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카르타고인들을 대거 학살한 것을 비롯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일본인의 난징·관동대학살, 부족 간 내전이 벌어진 르완다 학살, 세르비아의 코소보인 학살 등은 악명높은 제노사이드로 기록된다.

특히 700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로 산업화, 체계화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이후, 집단살해 범죄를 정의하고 방지하기 위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 CPPCG)’이 만들어졌고, 우리나라도 1950년 이 조약에 가입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에 제정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이러한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단체에게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빌려, 추잡한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승격시킨 이스라엘은 수많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살해해놓고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들의 예외적인 ‘이노센스’(innocence)를 주장한다(프레데르크 로르동의 글 참조).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반인륜 범죄에 희생당한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젠 나치를 닮은 가해자가 된 이스라엘은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나라인 남아공 정부의 제소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가 지난 1월 27일, 이스라엘에 임시조치 명령을 내렸다.

회원국 17개국 중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반대한 이 재판소의 명령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그들을 상대로 한 제노사이드를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예방해야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네타냐후는 정반대로 나아갔다.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마치 십자군 성전을 치르듯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왔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반전시위로 곤혹스러운 입장이 된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타냐후는 가자지구 최남단도시 라파에 폭탄을 퍼부을 태세다. 

그럼에도, 미국 최고의 정론지라고 자부하는 <뉴욕타임스> 등 주류 언론은 최근 확산되는 반전시위 참여자들을 외부의 좌파 선동가들이라고 규정짓는다. 문제의 본질을 회피한 채, 미국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를 한 까닭이다. 

“뉴욕대, 뉴욕시티대, 컬럼비아대 등에 체포된 시위대의 상당수가 외부의 좌파 선동가들이었으며, 대학 강의실에는 마오쩌둥 중국 초대 주석의 혁명구호인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등이 적혀 있다”고 앞다퉈 보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지구촌 곳곳에 확산되는 반전의 목소리는 오늘도 거침없이 울려 퍼진다.

세계 각국의 시민단체들이 이스라엘 권력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제노사이드 범죄혐의로 제소한 데 이어, 국내의 참여연대와 사단법인 아디가 지난 5월 9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한 책임자 7명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국제형사범죄법상 집단살해, 인도에 반한 죄, 사람에 대한 전쟁 범죄 등의 혐의로 수사해달라고 고발장을 제출한 것은 새삼 국제연대의 엄중함과 무게감을 일깨운다.

‘살아있는’ 권력층에 대한 수사 기소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온 우리 검찰이 네타냐후 세력의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과연 어떻게 기소할지 주목된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고 있는 반전시위에 대해 국내외 주요 언론은 오늘도 ‘친 팔레스타인, 반 이스라엘 시위’라고 기계적으로 비틀어 말한다. 언제까지 팔레스타인은 ‘악’이고 이스라엘은 ‘선’일 것인가?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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