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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에서 <서울의 봄>으로
<정이>에서 <서울의 봄>으로
  • 송영애 l 영화평론가
  • 승인 2023.12.2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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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대로 ‘영화 잇기’ 중이다. <더 문>(김용화, 2023)에서 시작해 <더 문>(던칸 존스, 2009), <베리드>(로드리고 코르테스, 2010), <정이>(연상호, 2022) 다음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지난해 11월 22일에 개봉해, 성탄 연휴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김성수 감독의 <서울의 봄>(2023)이다.

 

순응과 대항

<정이>를 보며 <서울의 봄>이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인물’ 때문이다. <정이>가 아무도 모르는 2194년 가상의 미래를 담았다면 <서울의 봄>은 널리 알려진 1979년 실제 과거를 담아냈는데, 두 영화 모두 대세를 거스른 인물의 이야기다. 순응, 복종, 대항, 항명, 외면, 방관 등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외로워도 용감하게 대항했던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홀로 용감히 싸우는 인물’은 장편 극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캐릭터다. 크고 작은 역경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처음에는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야 천차만별이지만, 관객은 그들 편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안타까워하고 또 기뻐하게 된다.

<정이>와 <서울의 봄>.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장르는 매우 다르지만,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각각 거대한 힘 앞에 맞선다. <정이>는 미래를 배경으로 했기에 저런 일에 어찌 대비해야 할지 걱정하게 되고, <서울의 봄>은 이미 결론을 아는 과거를 배경으로 했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정이>에서 정이(김현주)는 딸 서현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기꺼이 용병이 됐다. 그러나 서현이 수술받는 동안 전투에서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수술로 살아남은 어린 서현은 엄마의 뇌 정보를 기업 크로노이드에 양도한 대가로 교육과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현재 서현(강수연)은 크로노이드 기업의 ‘정이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그런 모든 상황에 순응 중이다.

<서울의 봄>에서 군사 반란으로 명명된 1979년 12월 12일 군사 움직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적어도 겉으로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이다. 사조직을 만들고, 요직을 차지하려는 시도 등이 펼쳐지긴 하지만, 10.26 사건 이후 당시 법에 모두 복종하고 상황이 통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변화가 생긴다. <정이>에서 서현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뇌 정보 이식 수준에 따라 권리와 의미가 매우 다르지만, 생명 연장 방법 선택을 제안받았다. 결국 자신의 엄마 정이가 했던 선택을 제안받은 셈이다. 과연 어찌해야 할까? 서현은 순응해왔던 체제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서울의 봄>에서는 1979년 12월 12일의 해가 떴다. 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을 위시한 하나회 소속 군인들은 육군참모총장 체포를 위해 외형적 절차를 지키겠다고 한다.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을 위시한 진압군 세력이 나선다. 반란군과 진압군의 대결 속에서, 복종과 항명이 뒤섞인다. 반란으로 인해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서약은 깨졌지만, 반란군 내 순응과 복종은 강화된다. 그리고 진압군 내 상명하복은 오히려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반란군은 스스로 ‘대세’라 칭하며, 회유와 협박, 설득을 시도한다. 순응과 복종, 대항을 오가는 밀고 당기는 세 대결 속에 점차 반란군은 규모를 키우고, 진압군은 쪼그라든다.

내가 만약 저 상황에 있었다면, 순응하는 쪽일까? 대항하는 쪽일까? 혹은 외면하는 쪽일까? <정이>에서 서현의 팀원이라면?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과 전두광의 전화를 모두 받은 사람이라면? 대세라고 판단되는 쪽, 즉 힘을 따를까? 아니면 옳다고 판단되는 쪽, 즉 정의를 따를까? 혹시 내가 선택할 쪽이 소수일지라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선뜻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정이>에서 정이

선택

앞에서는 <정이>와 <서울의 봄>에서 발견되는 순응과 대항 상황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제, 선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순응하든 대항하든, 혹은 외면하든 모든 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니 말이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 밤 9시간 동안 일어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담아낸다. 반란군에 가담하느냐 마느냐는 선택부터 상부의 지시대로 저 문을 여느냐, 열지 않느냐 등 선택의 상황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선택을 강요받는 사람도 많고, 기꺼이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예’와 ‘아니오’ 중 한쪽을 선택하기 위한 고민이 이어진다.

<정이>의 서현과 <서울의 봄>의 이태신이 소신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반면,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순응과 복종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있다. <정이>에서 로봇인 정이와 상훈은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정이는 실험용 시뮬레이션 전투를 실제 전투라 여기며 참전해 부상당하고 폐기된다. 그러면 또 다른 로봇 정이가 시뮬레이션 전투에 투입되고, 참전-부상-폐기가 무한 반복된다. 서현의 상사인 상훈은 팀원들에게는 잔혹하고, 회장에게는 과잉 충성한다.

<서울의 봄>에서도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병사들이 나온다. 그들은 상부의 선택으로 인해 반란군 혹은 진압군이 된다. 게다가 ‘밀당’ 중인 상부로 인해 명령도 이랬다, 저랬다 한다. 어느 명령에 복종해야 할까? 그 와중에 안타까운 죽음도 발생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저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내가 만약 반란에 참여하라는 혹은 최소한 외면하라는 회유 전화를 받았다면 받아들이겠는가? 내가 만약 아군에게 총을 겨누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나에게 선택의 기준이란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내게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훗날 ‘군사 반란’이라고 명명된 일이지만, 12.12 직후 꽤 오랜 시간 반란군이 집권 세력이었고, 현재도 그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 않는가? 먼저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사전에 약속한 매뉴얼이 얼마나 견고하고 정당하냐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만약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악법도 법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얼마나 용감하게 지킬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물론 각각의 원칙과 소신이 모두 같지는 않을 테니, 얼마나 설득하고 설득당하느냐의 문제가 남긴 한다.

올 한해 내가 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특히 그 선택의 기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과연 훗날 후회하진 않겠는지.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으니, 모든 선택을 만족하게 되진 않겠지만, 선택의 순간 치열하게 고민한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덜 후회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보고 싶다. 나에겐 매 순간 선택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졌는가?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 선택의 기회를 줬는가?

참 많은 생각과 고민을 던지는 영화 <정이>와 <서울의 봄>이다. <서울의 봄>은 관객 1천만을 돌파했다. 아마도 이 영화 관람을 선택한 사람 중 상당수는 나름의 지점에서 검색과 고민, 생각 중일 것 같다. 충분히 찾아보고, 고민하면 좋겠다. 영화의 여러 영향력 중 하나인데, 마음껏 누리는 것도 관객의 특권이니 말이다.

<더 문>(김용화, 2023)에서 시작한 ‘영화 잇기’는 <서울의 봄>으로 끝낼까 한다. 중간에 예전 영화들을 몇 돌아봤지만, 시작과 끝은 올해 개봉 영화였다. 내용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다른 영화지만, 두 영화 모두 한국영화계가 해낸 과감한 선택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 영화는 현재와 더불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담아내고 있다. 

<더 문>을 통해 가까운 미래 달 탐사를 목격했고, <서울의 봄>을 통해 과거 12.12 군사 반란도 목격했다. 영화적 상상력과 그 상상을 시청각화할 능력을 갖춘 한국영화의 다양한 작품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교육 관련 연구를 지속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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