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예배가 있다고 한다. 종이 울리고 둥그렇게 모여 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린다. 교회가 아니라 강변의 천막 앞에 신도들이 모였다. 장엄한 오르간 연주 대신 새가 울고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현장 예배다.
이 예배에는 성경 구절 낭송, 대표기도, 목사의 설교가 없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을 지키는 활동가의 간증이 있다. 강의 흐름과 흰목물떼새의 산란을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경청한다. 이 간증과 물 소리, 새 소리가 아멘을 대신한다.
감사헌금, 십일조헌금, 건축헌금을 낸 성도를 기억하고 하늘 복을 넘치게 내려달라는 담임목사의 축도가 없고, 사람만 바뀔 뿐 매주 하는 회개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다짐, 이웃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대표기도가 없는 건 오히려 마음 편한 장면이다. 설교와 찬양 없이 강물이 흐르고 새가 우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그곳은 ‘기후교회’란다. ‘뭇 생명과 호흡하며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으로 한 달에 한 번 생태학살 현장에 모여 애통하며 함께 기도를 드린다는 ‘기후교회’ 보도를 접하고 기분이 좋았다.
보도에 따르면 ‘기후교회’는 지난 7월에 생겼다.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새로운 기독교 영성운동이다.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기를 바란다.
그러나 많은 목사와 더 많은 신자가 ‘기후교회’가 ‘교회’라는 명칭을 쓰는 데에 분개할지 모른다. ‘기후교회’가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고 고유번호증이나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단체가 아니기에 이 ‘교회’는 그저 모임 정도의 뜻을 갖는 것으로 관대하게 바라보면 된다. 교회가 원래 그런 의미이지 않은가.
조금 교회 생활을 하면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를 접하기 마련이다. 에클레시아(라틴어 ecclesia, 그리스어 ἐκκλησία)에서 유래했고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가 “불러 모으다”라는 뜻의 에칼레오(ἐκκαληώ)와 연결된다. 부름을 받은, 또는 불러 모은 신앙의 공동체가 교회이고, 예수를 믿는 믿음 그 자체가 교회이며, 믿음을 실천하는 연대가 교회이다.
지금의 교회는 건물 중심으로 파악되고, 그 건물을 매개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논한다. 건물에 상주하는 교역자들이 있고 직원도 있다. 자칭 성도라는 교회 출석자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 건물을 방문해 예수의 제자인 척한다. 물론 그중에 진짜 예수의 제자가 없지는 않겠지만 드물고 드물다.
예배라는 것은 신앙의 한 형식이기에 믿음의 선배들이 수립한 예전이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원론상 건물과 의례는 믿음을 담아내는 그릇에 불과하다. 믿음이 없다면 건물과 의례는 무의미하다.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그런 무의미를 매주 쌓아가고 있는지, 그런 무의미에 본말이 바뀐 상황에 얼마나 무감각해졌는지 놀랄 정도다.
한국 교회의 부패와 목사의 타락이 너무 당연한 모습으로 간주되기에 이제 경종을 울린다는 말 자체의 효용이 사라졌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비판에 눈 감는 개신교라는 이미지가 사회에 점점 더 고착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 소수의 기독교인이 모여 생태파괴의 현장에서 창조세계의 고통을 애통해하며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개신교도 모두가 나처럼 생각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절대다수의 기독교인이 나와는 반대로 생각하며 심지어 저런 형태의 교회는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할 것만 같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것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건물과 예전, 이익과 타성의 네트워크로 전락한 교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 그저 서서히 또 추하게 침몰할 뿐이다. 진보, 보수와 무관한 지구촌 공동의 의제인 기후위기에 한국 교회 대다수가 눈 감고 있다. 개신교는 기후위기에 원죄가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근대국가 성립과 자본주의 발흥에 일익을 담당하며 현재의 문명사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에 일조했다. 인류문명을 의식하는 선각자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하고 싶다면 교회는 기후교회가 돼야 한다. 거기에 책임까지 함께 느낀다면 더 좋긴 하겠다.
안치용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ㆍ전 경향신문 기자, 한신대 M.div 및 신학박사 과정 수료. 협동조합언론 가스펠투데이 기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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