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 국회 앞 시위 현장에 가봤는가? 전국의 시민단체와 노조, 정당, 친목 단체, 대학동아리들이 저마다 고유깃발을 휘날리면서 시위에 나서지만, 나 홀로 또는 연인이나 친구끼리 리더도 없이 대오(隊伍)도 흐트러지고, 구호도 제각각 외쳐댄다.
시위대에게는 거리가 곧 광장이다. 2백만 명이 훨씬 넘는 시위대가 모인 즉석 거리광장에는 응원봉을 흔들어대며 ‘다시 만난 세계’, ‘아파트’, ‘삐딱하게’, ‘불타오르네’, ‘위플래쉬’, ‘슈퍼노바’와 같은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고, 다른 곳에선 어떤 이들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어떤 이들은 시험 공부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유모차를 이끌고, 어떤 이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계엄령을 선포한 권력자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시위 현장에 늘 등장하는 노조나 노총, 동아리, 정당의 구태의연한 깃발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오히려 휘날리는 기상천외한 시위대의 깃발이 더 눈길을 사로잡는다. 10대 중고생은 물론, 20~30대의 대학생과 직장인들이 시위에 나서 노래와 춤이 한결 경쾌해지고, 곳곳에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무엇보다도 20대 여성들이 시위대를 주도하는 모습은 새로운 사회적 흐름으로 읽힌다.
“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줘라, 우리까지 나서야겠냐”라는 의미를 지닌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전국 뒤로 미루기 연합’, 시위하다가 물 주는 일을 잊을까 걱정하는 ‘화분 안 죽이기 실천 시민연합’ 등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시위대가 응원봉을 든 이유는 박근혜 탄핵 당시 촛불이 금방 꺼졌다고 망발한 국회의원 때문이고, 재치 있는 상식 밖의 깃발 문구는 역시 탄핵 시위 배후가 있다고 퍼뜨리는 음모설에서 ‘배후는 나 자신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리라.
하지만 시위대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기존의 조직화되고 계급 중심적인 시위에서 벗어나, 시위대는 무질서하지만 환경운동, 페미니즘, 소수자 권리, 비정규직 권리, 장애인 인권, 반려견 및 반려묘 권리 등 다양한 메시지를 신명 나게 춤을 추며 표출했다.
권력자의 위세 당당한 ‘처단’ 발언에 시위 현장은 도리어 축제의 큰 마당이 되었다. 없는 죄도 만들어 총살형을 내렸던 무시무시한 검찰, 탱크와 장갑차와 헬리콥터를 앞세워 민간인을 학살했던 살벌한 군대를 가진 계엄 정권은 이런 ‘무질서한’ 시위대에 결국 무너졌다. 그러나 이 ‘하찮은’ 움직임들이 그토록 위압적인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던 것은 시위의 놀라운 유연성 덕택이다. 정치 기획자의 음모 섞인 구호가 없는 시위에는 정해진 울타리와 성역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알랭 투렌은 무정형적(無定形的) 시위문화의 확장성과 파급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젊은 세대가 훨씬 더 다양한 이슈를 들고 나온 시위 현장은 수구 보수당 국민의힘이 우려하는 전통적인 ‘계급투쟁’의 장이 아니다.
미래의 세대가 꿈꾸는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인 셈이다. 국민의힘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면서 ‘종북세력 축출’,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는 ‘극우’ 시위에 기대어 젊은 세대의 신사회운동에 눈을 감는 것은 그들로서는 비극의 결과를 예고 받는 셈이다.
어쩌면 미래 세대의 신사회운동은 경쾌한 춤과 노래로 87년 체제의 낡은 민주주의를 날려보내고, 다양성과 다원성을 강조하는 2024년 체제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가 되리라 여겨진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1월호는 ‘직접 민주주의의 복원’이라는 탄핵의 정치사회학적 의미를 짚은 특집을 마련했다. 독자 여러분의 열독을 기대한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