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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조문, “아베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에 헌신”
대통령 조문, “아베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에 헌신”
  • 한승동 l 언론인
  • 승인 2022.08.01 09: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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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은 그 나흘 전에 일본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장에서 40대 남성에게 피격당해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서울 분향소를 찾아가 조문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고 아베 신조 전 총리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유족과 일본 국민들께도 깊은 위로를 표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이 앞으로 긴밀히 협력해 나가길 바랍니다.”

분향소를 직접 찾아간 것까지 못마땅해 한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국가 간의 기본 관례나 의례상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을 위로하고, 양국관계 협력을 바란다고 한 것이야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이란 수식어에는 다들 뜨악했다. 딱 걸려서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넘길 수 없는 가시 같은 느낌을 많은 사람들이 갖지 않았을까. 꼭 그런 표현을 해야 했나? 의례적인 수사일 수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 쓸 수 있는 다른 표현들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서 쓴 말이라면 그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것 아닌가?

 

죠슈 출신 이토 히로부미-아베 신조

미국 조야의 조문객들도 그 비슷한, 또는 그보다 더한 표현도 썼지만, 미국이야 그럴 수 있다. 그들은 의례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건 이상할 것 없다. 20세기 초부터 이어져 온 그들 간의 철저한 ‘이익동맹’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과 한반도 출신자들은 그들과 처지가 전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은 왜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이란 수식어를 아베 신조 앞에 붙여서는 안 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90대, 그리고 96~8대)는 1954년에 한반도와 가까운 야마구치현(죠슈)에서 태어나 자랐다. 2022년 7월 8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의 야마토사이다이지(大和西大寺) 역 앞 유세장에서 그는 피격당해 사망했다. 향년 68.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로, 2020년 9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집권 자민당 최대파벌 영수로 일본 정계의 사실상의 지배적 ‘현역’이었다.

그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토도 죠슈 출신이었고, 역에서 총격당해 죽었다. 1841년생인 그의 향년도 68. 조선 침략의 총지휘자였던 그는 그때 한반도와 만주의 이권이 걸린 동청철도 문제 협상을 위해 러시아에 갔다. 총리 자리를 떠났고 조선 통감 자리에서도 그 얼마 전인 1909년 6월에 물러났으나, 추밀원 의장 자격의 여전한 실력자로 하얼빈에 갔다.

이 두 사건 사이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다. 하지만 깊은 역사적 연관성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지독하게 얽어매고 헝클어 놓은 역사의 짚 북데기, 또는 실타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아베 2기 정부 대변인이었던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공개적으로 얘기했다. 이 놀라운 발언은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건국 이념의 핵심요소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한국과 중국이란 나라 자체를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건 자신들이 침략자 군국 일본의 연장이요 동일체임을 스스로 자백한 것이기도 했다. 스가는 아베 2기 정부 내내 관방장관을 지낸 실세였고, 아베의 힘으로 자민당 총재와 총리까지 지냈다. 말하자면 관방장관 스가의 발언은 곧 아베의 의중이요 발언이었다. 

예컨대 지금의 독일 정부 대변인이 어느 날 히틀러의 나치스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나 드골, 처칠을 테러리스트라고 공개적으로 못을 박으면 어떻게 될까. 영국 총리 관저에서 어느 날 별안간 워싱턴이나 프랭클린, 제퍼슨, 애덤스 등 미국의 독립영웅들을 영국 지배에 대든 테러리스트들이라 비난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자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옛 침략국 정부 대변인이 테러리스트라고 공언했는데도 한국 사회가 별다른 반응도 없이 지나간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스가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공언한 것은 동아시아인 2천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범국가인 군국일본과 지금의 일본이 동일체라는 생각에 추호의 의심도 해 본 적이 없는 정신상태를 반영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토 히로부미와 아베 신조는 그렇게 연결돼 있었다. 2015년 ‘전후 70년 담화’에서 아베는 러일전쟁을 아시아 피억압 민족에게 희망을 준 민족해방전쟁이라도 되는 듯 묘사했다. 러일전쟁 때 이미 조선을 폭압적으로 점령한 일본군은 전쟁 뒤 바로 미국과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7월), 그해 11월에 통감부를 설치해 외교권을 빼앗아 사실상 조선 강점상태에 들어갔다. 그 초대 통감이 이토였으며, 하얼빈에서 사살당하기 약 3개월 전까지 통감 자리를 지켰다.

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공언한 관방장관이 대변하는 정부의 수장이었던 아베에게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한”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건 군국일본의 조선 침략이 곧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는 얘기인가.

 

또 다른 ‘유신’ 5·15와 2·26

이토와 아베 두 사람 모두 죠슈(야마구치) 출신이다. 죠슈는 사츠마(지금의 규슈 가고시마 지역 일대)와 함께 ‘메이지 유신’의 중심 무대였다. 그 두 지역 출신 하급 사무라이들이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출현 이후 급속히 진행된 근대의 충격 속에 해체되기 시작한 신분제에 대한 불안과 불만,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으로 똘똘 뭉쳐 일으킨 ‘왕정복고 쿠데타’가 메이지 유신이다. 유명무실한 존재였던 ‘천황’을 앞세워 중앙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되풀이됐고, 그것이 일본의 역사를 바꿨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그런 시도에는 늘 이들 죠슈와 사츠마(삿쵸) 출신 인맥들이 그 중심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전 총리 피격사건 뒤 유사 사건들을 찾아보니, 1921년 11월에 하라 다카시 총리가 도쿄역에서 남성의 흉기에 찔려 사망했고, 1930년 11월에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도쿄역에서 남성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1932년 5월에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가 관저에서 무장한 해군 청년 장교단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5·15사건) 그리고 1936년 2월에는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재무장관), 사이토 미노루 내대신(제3, 5대 조선 총독), 와타나베 죠타로 교육 총감이 관저 등에서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단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2·26사건) 

총리 등 중앙정계 요인들 암살에는 공통점들이 있다. 안 의사의 이토 사살을 예외적인 것으로 하면, 대체로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는 가운데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중앙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성이 커지는 시기에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다. 특히 1930년대의 사건들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일본도 극도의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혼란을 피할 수 없게 된 가운데 일어났다. 일본의 쇠퇴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비극적 퇴장 역시 그런 시대 상황의 귀결이자 하나의 징후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5·15와 2·26사건은 군부 청년 장교들이 천황을 앞세우며 간신배들을 처단하겠다는 ‘존황토간(尊皇討奸)’ 등의 기치를 내세우고 시도한 쿠데타로, 쿠데타 자체는 실패했지만 일본을 군국주의 침략전쟁으로 몰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10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발의가 가능한 총 의석 수의 3분의 2 이상을 개헌파 의원들이 차지한 것(중의원은 이미 그전에 발의 정족수를 채웠다)을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5·15와 2·26 사건은 반동적 왕정복고 모양새를 띤 일종의 메이지 유신 아류 쿠데타로 볼 수 있다. 이름은 유신(維新)이지만, 새롭게 고친 것이 아니라 늘 과거의 것으로 되돌아간 것이 일본의 유신이다. 하급무사와 청년 장교 등 무사·군인들이 일으킨 이런 사건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메이지 유신이 ‘정한론(征韓論)’과 얽혀 있듯이 강력한 극우 애국주의에 토대를 둔 침략주의적 대외팽창 노선과 하나로 얽혀 있다는 점이다. 5·15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31년 9월에 이미 ‘만주침략(만주사변)’이 시작됐고, 그 3개월쯤 뒤인 1932년 1월에 일본군은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노골적으로 중국 본토침략을 시도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시라카와 사토시 일본군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등을 도시락 폭탄으로 폭사시킨 것이 그해 4월이었다. 2·26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37년 일본군의 중국본토 침략이 본격화됐고, 난징 대학살이 그해에 자행됐다.

 

뒤바뀐 한일의 운명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갈 때 그는 경부선-경의선을 거쳐 남만주철도를 타고 일로 북진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7세기 신라 통일 이래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영역이 만주와 연해주 남부까지 확장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리라고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산, 서울이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져 있었고 만주 일대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간도와 연해주까지 지금과 같은 장벽은 없었다. 지금의 분단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 시초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강점, 그리고 일제의 패전과 미군의 진주였다. 일제 패전 뒤 한반도는 거기에 사는 주민들과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분단 당했다. 그런데 가해자였던 전범국 일본은 오히려 전쟁범죄도 제대로 추궁당하지 않고 전쟁 배상금도 제대로 내지 않은 채 전승국 미국의 최대 동맹국이 되면서 사실상 전승국적 지위를 부여받고 막대한 안보·경제 지원 속에 번성했다. 이토가 우리를 밀어 넣은 짚 북데기요 뒤엉킨 실타래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더 꼬였다. 결과적으로 그들 대신 피해자인 우리가 짚 북데기 속으로 더 깊숙이 밀려들어가고 가해자인 일본은 구원받았다. 우리는 한국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남북한 전체, 분단돼서는 안 될 국토 전체와 남북 민족 전체의 손익을 생각해야 한다.

 

아직도 굳건한 샌프란시스코 체제

이 뒤집힌 현실을 확정하고 지금까지 유지시켜 온 것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4월 발효)과 미일 안보조약이다.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때 미국은 한국이 일제 강점기 내내 항일전을 계속한 점을 인정하고 전승국(연합국)으로서 강화조약 서명국 명단에 넣었다가 일본과 영국의 반대로 막판에 빼버렸다. 독도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된 것도 그때였다. 일제 최대 피해국들인 남북한과 중국 대만은 강화조약에 당사자로 초청받지도 못했다. 필리핀이 전승국으로 5억 5천만 달러, 인도네시아가 2억 2308만 달러, 버마(미얀마)가 2억 달러 등의 배상금을 받은 것은, 그들 나라가 미국, 인도네시아, 영국 등 식민종주국이자 연합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남북한과 중국은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 경제협력금 따위의 이름으로 필리핀보다 더 적은 돈을 나중에 받았다. 그런 것을 정한 것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그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지금도 굳건하다. 냉전 붕괴 뒤 미국과 일본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해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적만 소련에서 중국(+러시아)으로 바꾼 신냉전체제.(샌프란시스코 2.0체제) 

아베 신조와 그의 정치적 사표(師表)인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1957~1960년 총리), 기시의 친동생이자 아베의 종조부 사토 에이사쿠(1964~1972년 총리 재임), 그리고 외상을 지낸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등 죠슈의 ‘정치 명문가’ 세습정치인들의 일관된 목표는 그것을 위한 개헌과 본격적인 일본 재무장이었다. 아베가 마지막까지 집착했던 (CP)TT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이나 쿼드(QUAD),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그리고 미국과 함께 이른바 ‘프렌드 쇼어’를 결성해 중국을 견제, 봉쇄하려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70여 년 전에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규정한 현실을 고착시켜 계속 연장하려 했던 아베의 구상은, 말하자면 현상 변경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한반도는 계속 분단된 채, 이른바 신냉전체제하에서 과거 동서냉전 때처럼 그 제일선에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쌍방이 동족과의 소모전을 계속하면서 일본의 이익을 지키는 최전방 노릇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베가 얘기하는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이라면 거기에 “헌신”한 그를 예찬하며 명복을 비는 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미국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한일 간 ‘화해’와 ‘관계회복’을 전제로 한 이른바 한미일 삼각공조라는 것도 그 본질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한일관계 회복이며 삼각공조라는 얘긴지를 우리는 따져 봐야 한다. 

  

최대현안,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소송

수교 이래 최악으로 치달은 지금의 한일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은 강제동원 피해자(징용공) 배상 문제다. 이것도 결국 이 샌프란시스코 체제 유지를 위한 일본 자민당 정권의 일종의 마지노선 전략 때문에 빚어진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는 일제 강점기 때 강제동원 돼 일본 전범 기업인 미츠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 등에서 노역을 하고 임금조차 강제위탁 돼 결국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그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있느냐가 하나의 관건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청구권협정)에 따라 이미 해결이 끝난 문제라며 그에 따라 피해자들에겐 청구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도 한일협정으로 없어진 권리는 국가가 자국 피해자들 권리를 보호하는 ‘외교보호권’일 뿐 피해자 개개인들의 청구권리는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한일협정에서 최종적으로 해결한 것이라고 합의했고, 그 모법에 해당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도 일본의 배상의무를 제한하는 명문 규정이 있는 것을 근거로 배상을 요구할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지만, 그것을 재판을 통해 청구할 수는 없다는 기괴하고 자가당착적인 판결을 내리고 있다. 

어쨌거나 일본 정부는 이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근거로, 소송 청구인(피해자)들에게 약 1억 원씩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확정판결을 내린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판결대로 배상을 강행할 경우 양국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한국 정부에게 해법을 들고 오라고 요구하고 있다. 즉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을 번복하게 만들든지, 군대라도 동원해 이행을 중지시키든지, 자체 돈으로 해결하든지 일본과는 무관하게 한국 정부가 알아서 처리해야 양국관계가 ‘정상화’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본과는 무관한 것으로 처리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피해자들 요구의 핵심이 가해자들, 즉 열악한 조건에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임금까지 떼어먹은 전범 기업들과 이를 조장한 일본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한 뒤 배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해 당사자들은 몽땅 빠지고 한국 정부나 한국기업 또는 한국민들의 돈으로 처리하라니 받아들일 리 없는 것이다. 전임 정부를 한일관계 악화의 주범인 양 몰아붙이면서 조속한 한일관계 회복을 공언해 온 윤석열 정부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자니 일본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양보를 받아내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전범 기업들의 배상 움직임까지 막으면서 거부하고 있는 판인데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에게 일방적인 양보를 요구했다가는 2015년의 ‘위안부 합의’처럼 설사 강행 처리하더라도 나중에 원천 무효가 돼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샌프란시스코 2.0체제

일본이 국제법 위반을 내세우며 한국 정부에게 해결책을 들고 오라고 완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과거사 범죄에 대한 불감증 내지 오만 탓도 있지만,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배상이 진행될 경우 일본 정부가 주장해 온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 자체가 허물어지면서 2차대전 이후 일본의 번영에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동아시아 동서냉전 대응체제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는 1990년대 초의 냉전 붕괴와 함께 소멸될 운명이었으나 조약의 주역인 미국과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는 등 냉전체제 해체를 사실상 외면하면서 미일 동맹이 아시아태평양 전후체제를 주도해 온 장치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도 온존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소련 붕괴 뒤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면서 미일은 주적을 중국으로 재설정하고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재강화하는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2.0체제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것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인데도 오히려 전승국 대우를 받으며 미국의 최대 동맹국으로서의 특혜 속에 번영을 구가해 온 일본이 바라는 바다. 하지만 예컨대 전승국이면서 패전국 취급을 당한 채 분단되고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남북한이나 중국은 계속 분단된 상태 속에서 새로운 적과 갈등 내지 대립하면서 미일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말하자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향후 운명과도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필사적으로 이미 배상문제는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로 완전히 끝난 것이라며 자신들과는 무관한 쪽으로 처리돼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다. 그것이 아베 신조가 말한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이자 번영과 발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아베가 표방했던 그런 가치와 발전과 번영에 대한 그의 헌신을 찬양하는 것은 결국 한일협정과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연장에 동조하면서 2차대전 이후 한국민에게 비참과 굴종과 빈곤을 안겨 주었던 기존의 아시아태평양 질서를 그냥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일은 자유와 민주주의 및 시장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흔히 듣는 얘기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일본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계속 그런 미일 중심의 세계에 종속당하며 살 것인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요구할 것인가? 

 

단교? 선전포고?

8~9월에 압류 중인 미츠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이 매각돼 현금화되고 배상금으로 지급된다면, 즉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법이 정한 대로 이행이 된다면 일본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엄포한 대로 수습할 수 없는 엄청난 파국적 상황이 벌어질까?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그럴 경우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의외로 별게 없을지도 모른다. 단교? 선전포고? 수출규제 강화? 미국에게 편들기 요청?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모두 쉽지 않고, 설사 강행하더라도 일본에게 반드시 유리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더 큰 소리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협상과 타협을 해야겠지만, 예전처럼 눈치 보며 끌려다닐 이유가 없어졌다. 그만큼 한국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베가 헌신한 것이 정말로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는지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한일 보수우익세력의 위험한 동조화 

3년 전 <녹색평론>(2019년 9-10월)에 기고한 글 중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일본 우파세력이 문재인 정부 등장을 얼마나 싫어하고 경계했는지, 지난해(2018) 초에 출간된 무토 마사토시 전 주한 일본대사의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책을 보면 잘 드러나 있다.

대사직(2010~2012년)을 포함해 한국에서 12년을 일한 일본 고위관료 출신인 그가 책에 풀어 놓은 얘기들은 실로 충격적이다.

“박근혜는 뭐니 뭐니 해도 5천만 한국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이었다. 그게 고작 백만 명의, 그것도 북조선(북한)의 공작원이 관여했을지도 모르는 데모(대)에 의해 탄핵 결의로 내몰렸다. 이것이 민주화의 발로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문재인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나라, 김정은의 북조선을 어떤 나라보다 지지하는 정책을 내걸고 있다. 그런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정말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가?” <산케이>와 더불어 일본 보수우파의 대변지인 <요미우리신문> 등은 촛불시위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미숙 탓이라고 논평했다.

무토는 심지어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친북정권”에게 정권을 넘기기 위한 시나리오에 머리(생각)보다 감정(하트)이 앞서는 한국 유권자들이 넘어간 탓으로 돌렸다. “‘촛불 데모’는 친북세력인 노조와 시민단체가 분위기를 띄우고 국내 대립을 부채질해 북에 대해 면역이 없는 일반인, 특히 젊은 국민이 이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감정(하트)에 불이 붙은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파면(소식)을 불과 2시간 뒤라는 이례적인 신속성으로 북 미디어가 보도한 것도 일련의 활동에 적지 않은 북의 관여가 있었다는 의혹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일국의 대사를 지낸 사람의 사고편향과 편견이 실로 놀라울 정도지만, 더 놀라운 것은 기본적인 팩트 식별능력조차 없어 보이는 한심한 지적 수준과 저열한 분석 및 사고 능력이 아닐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일본의 주요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주재 대사를 했는지, 일본으로서는 심히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그가 일본에서 매스컴의 총아로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니며 책들도 쏟아내는 게 실로 기이해 보였다. 그러니 지금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이해나 인식수준이 저 모양인가 싶기도 한데, 문제는 한국과의 관계만 그런 게 아니라, 요즘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가 전반적으로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심각한 발육 정지 내지 내향적 역진화 또는 흔히들 얘기하는 갈라파고스 신드롬(자신의 표준만을 고집하여 세계시장에서 고립되는 현상)이라고 할까. 정치, 경제, 문화 모두 퇴락 조짐을 보이는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요즘 한국 정부의 무모하고 무익해 보이는 전임 정부 때리기를 보면 일본 자민당 우익정치세력의 그런 자멸적 현상에 동조화 조짐을 보이는 건가 싶어 불안하다. 

 

 

글·한승동  
<한겨레> 도쿄특파원과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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