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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공에서 7공으로, ‘세대 책무성’으로서의 공화국 교체와 신(新)사회계약
6공에서 7공으로, ‘세대 책무성’으로서의 공화국 교체와 신(新)사회계약
  • 이해영 l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 승인 2021.12.0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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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등 우리 근대사에서 ‘입헌’적 시도, 혹은 그런 시도의 맹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이 입헌군주국이었던 적은 없었다. 또 공화주의적 정체(政體)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주체든 이념이든 당대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공화주의 맹아는 3.1 혁명운동 시기 재소환된다. 단 한 번이라도 ‘제(帝)국’다운 제국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이후 친일의 거두가 됐던 윤치호조차도 자조적으로 자문했던 대한제국이 ‘민국’으로 변혁적으로 재해석된 뒤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외형상 입헌군주정 체제였던 일본제국주의와 우리의 민국 즉 공화정은 태생부터 빙탄불상용의 관계였다.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운동은, 이 유명무실한 ‘민국’, 즉 ‘공화국’을 온전한 자주적 민주공화국으로 세우는 일이었다.

우리의 해방, 즉 공화정의 수립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지정학적 세력균형에 따라 미·소는 전리품 한반도를 나눠 먹었고, 그 결과 2개의 공화국이 수립됐다. 그 남쪽에 ‘흠정(欽定)’ 공화정 곧 제1공화국이 수립됐다. 그러나, 그 ‘공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임금’을 투표로 뽑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절대빈곤 상태에서는 투표권도 생계를 위해 사고파는 물건에 불과했다. 4.19혁명은 공화정에 ‘민중이 민주주의’라는 내용을 채운 첫 번째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혁명적 2공은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박정희 쿠데타의 3공에 의해 유린당했다. 쿠데타 3공은 유신쿠데타 4공으로 연명하다 부마와 광주항쟁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공화정은 반공화주의적 이중 쿠데타(12.12 + 5.17) 즉 전두환의 5공에 의해 재차 좌절됐다. 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적 공화정은 비로소 시민사회적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5공은 파쇼적 억압의 기록물로 남았다. 6공이 사회적 기반을 확보한 것은 대단한 역사적 성과다. 하지만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갈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3,4,5공의 반공주의적, 극우적 폭압과 유착해, 압도적 압축성장을 구가한 ‘한국자본주의’라는 물적 기초다.

5공을 무너뜨리고 세운 6공은 6월항쟁의 산물이었다. 정확히 딱 거기까지였다. 말 그대로 ‘정치적’, 곧 정치과정의 민주화, 의회민주주의, 약간의 사회민주주의 (경제민주화, 사회복지)가 가미된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것의 정치사상적 표현인 자유민주주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단기’ 20세기 속 6월항쟁, 그리고 ‘n86’세대

편의상 1981년 학번을 기준으로, 386세대를 말하겠다. 386세대는 세계사적 위상에 있어 서구 자본주의 황금기의 후반기에 걸쳐 성장해, 단기 20세기의 마지막 해체기를 국내적으로는 6월항쟁과 6공의 수립을, 국제적으로는 자본주의 황금기 냉전의 한 축을 이뤘던 ‘현존’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앞당겨 다가온 ‘세기말’을 경험한 세대다. 생애주기로 보면 이들은 광주항쟁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대학생이 됐고, 국제 신냉전의 발발을 목격한다. 이들은 무엇보다 사상과 이념투쟁의 전사들이었다. 청년들의 생활세계는 친구와 적(友敵)의 정치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전두환정권을 ‘적’이라 부르는 가운데, 민족적인 것이 재발견됐고 이런 ‘저항적’ 민족주의의 내용은 무엇보다 주체사상과 그 혁명노선인 NL이 그 원천이 됐다.

한편, 구소련의 관변사상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또한 ‘정통’의 권위를 누리면서 이들의 정신세계를 구성했다. 그리고 1980년, 운동은 때로는 급속히 때로는 완만히 지그재그를 그리며 한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 끝에 6월 항쟁이 있었다.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신보수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국제조류에서 다분히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2000년대, 대학진학이 70%에 도달하면서 대학교육은 ‘사적 의무교육’이 돼 버렸다. 하지만 10%대에서 출발해 20%대에 진입한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들 세대는 페루, 멕시코 프랑스의 사례에서 보듯 엘리트주의적 변신의 맹아를 DNA속에 장착하고 있었다. 현존사회주의 붕괴 이후 약속이나 한 듯 고시원으로 퇴각(물론 전부는 아니다)할 수 있었던 것도, 혈관 속에 흐르던 초엘리트주의적 호르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겠다.

 

현존사회주의 붕괴와 레알폴리틱(Realpolitik)

한국 386세대는 ‘뒤늦은 자코뱅’으로 1989년 직전 아슬아슬하게 민주혁명에 성공한 세대로 역사에 기록됐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너머의 대안사회적 전망의 내밀한 공급기지였던 현존사회주의가 소멸하고, 그 변형이자 변주였던 북한체제에 대한 믿음도 심각하게 흔들린다. 이는 북한체제 자체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후 유일한 대안은 ‘시장’이었다. 과학기술혁명, IT와 중국붐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대안은 ‘현실성’을 기준으로 대부분 기각 및 삭제됐다. 남은 것은 시장과 자유주의로의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포섭, 생활/생계의 논리로 급속히 흡수되는 것이었다. 이때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된 시민사회(시민운동)는, 현재 시민사회운동의 기원을 이룬다.

시민운동과 보수-자유주의 야당 민주당과의 숨은 동맹 속에서, 시장과 레알폴리틱(Realpolitik)의 개념과 논리가 이들 386의 정신세계를 장악했다. ‘타락한’ 마키아벨리주의의 등장은, 이런 정신적 무장해제의 당연한 결과였다. 386이 시장과 IT, 벤처, 주식, 부동산, 교육계급, 부의 추구 등 미국식 자유주의 가치에 자발적으로 포섭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리듬, 호흡, 파동이 맞물린다. 새로운 정치란 기성정치권으로의 흡수통합이자 정치계급과 정치시장의 논리였다. 시민운동은 탁월한 보호막과 정치계급의 새로운 신분증명으로 기능했다.

민주화 이후 386의 경로는 내면에서부터의 해체, 조용한 붕괴, 자발적 해산과 해소의 과정이었다. 그것은 또한 사회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로의 이행이었으며, 이 세대를 지탱해온 ‘정치적인 것’의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현실정치 속으로 흡수, 소진된다.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고시’제도의 수혜자집단으로, 현실정치 속으로 각개약진, 집단으로서의 공동투쟁의 강령은 사라지고 인맥만 남았다. 등사기/철필에서 ‘슬기로운’ 운동생활을 시작, 타자기, 전동타자기, 286컴퓨터를 거쳤고 대중매체의 급성장, 확산에 올라탔다. 그리고 기술친연성, 조직적 경험 등 386 특유의 운동권 아비투스는 사회적 자본으로 변형돼, 실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386세대는 청년기의 치열함과 대조적으로, 1989년 이후 모래성처럼 소멸됐다. 이런 급속한 사상적 퇴행(해체)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는 (철학과 사상에 있어) 자기중심성의 부재, 그리고 밀반입된 사상이념을 정치적 도구로 삼은 데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86세대에서는 공통의 ‘신화’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세대동질성이 관찰된다. 낭만이 가미된 집단의 기억은 ‘불패의 성공신화’로 둔갑했다. 이토록 ‘젊은 그들’이 정치적으로 ‘풀보다 빨리 눕고’, 가장 조로한 세대로 변질된 것이다.

 

IMF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등장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와 봉건사회의 지배, 두 가지의 본질적 차이는 비인격, 공적 지배 형태에 있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봉건귀족은 농민당 정부에 의해 통치될 수 없었던 반면, 현대 민주제 사회에서는 자본의 지배와 노동당 정부가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울러 ‘자본제사회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부르주아계급이 ‘민주적’ 형태를 통해 지배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제사회에서의 계급지배가 언제나 국가에 의한 공적 형태라고 할 때, 그러니까 국가기구가 지배계급의 사적 도구로서 기능하지 않고 비인격적인 공권력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얼굴 없는’ 주권자인 인민의 주권과 부르주아지의 공적 지배 사이의 모순·긴장은 근대국가와 함께 발생한, 아주 오래된 주제다. 민주제는 여하튼 인민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주권자는 왕이나 귀족이 아닌, 인민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적’ 지배형태와 그 사회경제적 내용 사이에는 갈등이 발생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민주제의 폭과 수준은 주어진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민주주의는 강철 그릇이 아닌, 다공질(多孔質; 여러 모양과 크기의 구멍이 많이 나 있는 물질)의 그릇에 담긴 액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제도(민주‘제’)이자 다른 한편으로 과정(민주‘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정의 貯量(제도)인 동시에 流量(과정)이기에, 만에 하나 새로운 유량의 유입이 없다면 저량이 바닥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때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독재의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위기, 나아가 공화정의 위기를 시민적 개입과 동력으로 지켜낸 것이 지난 촛불‘혁명’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통해 공고화되지 않는 한, 취약해지면서 계속 위기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장권력의 견제는 자본제사회, 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전제다. 이미 경제사가 칼 폴라니는 20세기의 대재앙이 사회의 관계망으로부터 분리, 자립화(Disembedded)한, 고삐 풀린 시장의 권력에서 초래된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금융세계화가 한국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한 전환점은 1997년 IMF 외환위기였다. 그리고 헬 게이트 곧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80년대와 1990년대, 즉 386세대로서는 거의 30대까지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은 ‘발전국가’ 주도형 압축성장 모델이었다. 이는 박정희시대의 이른바 개발독재 관치경제의 연장선에 있던 것이다. 하지만 1997년 위기는 실로 게임체인저였다. 하필이면 새롭게 집권한 ‘상대적’ 진보권력이 위기의 대안으로 제출했던 신자유주의는 예상하지 못한 ‘연착륙’에 성공했다. 이때의 사회적 중견간부로서 386세대 역시 이 이행과정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순치 및 순응했고 또 DJ 정부하 IT바람을 타고 새로운 경제적 성공신화를 써내려간다. 

한국사회의, 이런 신자유주의로의 본격적 이행과정은 당시 386세대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수동혁명’이었다. DJ정부를 계승한 노무현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는 물론 정치적 레토릭의 성격이 강했던 일면도 있지만 정부 내 신자유주의 경제엘리트에 대한 착오와 착시를 유발함으로써 이에 대한 저항을 애매하게 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안착이 가지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 개별국의 정책공간이 협착되고 선택가능한 정책옵션이 세계시장조건에 의해 구조적으로 제약된 상태에서, 한국의 정치계급도 급속하게, 자발적으로 신자유주의화됐다.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대변자는 신보수, 리버럴 그리고 사회민주주의까지 포함된다.

둘째, 초국적 글로벌 기업은 이미 개별정부보다 우월적 지위를 구가한다.  일례로 월마트의 매출이 스웨덴의 GDP보다 높고 삼성의 매출이 북한 GDP를 능가한다. 그래서 ‘삼성공화국’이 가능하다.

셋째, 한국의 ‘좌파’ 집권기에, 진보적 지식인 그룹이 현저하게 체제내화되면서 ‘침묵의 카르텔’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저항담론이 현격히 약화됐다.

넷째, 노동자계층이 정규적/비정규직으로 분리/분화되면서 일자리와 생존이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됐다. 특히 정규직은 부분적으로 체제에 순응하면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현장기반이 되고, ‘서발턴(Subaltan; 하위주체)’ 그룹에 편입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 도시 화이트칼라 중심으로 시장, 경쟁, 효율, 세계화등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전파경로가 형성되면서 그 사회적 기반이 만들어졌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정치적 결과는 북미, 유럽을 중심으로 보면 포스트리버럴(Post-liberal) 민주주의 경향으로 나타난다. 급진시장주의, 사회 양극화, 불평등 심화, 사회적 정치적 균열 강화 등 민주주의의 공공적 기초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한국에서도 기층민중과의 단절 혹은 균열을 통해 386에서 출발한 n86세대도 지배계급에 진입했거나, 중상층계급에 안착한 사례가 적지 않다.

 

‘촛불혁명’, 불평등의 나라, ‘브라만좌파’

2006년 한미FTA 반대 운동, 2008년 미국산쇠고기 ‘촛불’, 2014년 세월호 사태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이명박근혜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의 ‘성공적’ 착근,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양극화로 특징 지워진다. 이 국면에서 한 때의 386은 시스템의 나사못으로 몸집을 좀 더 키웠고, 또 마치 바닷물 속 소금처럼 녹아 세대 정체성 역시 희석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양극화의 법칙은 이 세대에도 어김없이 작용, 성공한 386과 그렇지 못한 386사이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면서, 집단정체성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2017년 박근혜 탄핵을 가져온 2016년의 촛불‘혁명’은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지금 촛불혁명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측면으로 인해 다소 이른 감이 있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만 언급해 보기로 하자. 촛불혁명과 박근혜 탄핵은 한국정치사로나 세계정치사로나 매우 이례적이고 또 흥미로운 흔적을 남겼다.

첫째, 이제 586이 되기 시작한 n86세대로서는, 박근혜 탄핵은 정치 혁명의 두 번째 성공을 의미했다. 반전두환투쟁, 6월 항쟁에 대한 집단기억을 재소환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했다. 

둘째, 하지만 촛불은 이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다. 촛불은 사회운동사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이들 세대로서는 상당히 낯선, 네트워크형 혁명이다. 이미 한국사회에서 사회운동의 ‘영웅시대’는 진작에 종결됐다. 촛불혁명의 방식은 평화적이고 합법적이며, 유희적이었다.

셋째, 헌정사로 보자면 촛불과 탄핵은 민주적 정치과정의 ‘봉건화’ 위기에 대한 저항이자 항쟁이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합법적으로 탄핵한, ‘정당성’의 혁명이었다. 다시금 합법성이란 결코 실정법적으로 왜소화될 수 없는 정당성의 한 형식에 불과함이 확증됐다. 

넷째, 촛불의 주체는 ‘얼굴 없는’ 인민이었다. 그리고 그 이념의 중심고리는 ‘주권(자)’개념이었다. 가장 울림이 컸던 구호는 ‘민주공화국’이었다. 박근혜가 탄핵된 다음 날 (2017.3.11) <2017촛불 권리선언>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촛불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의정치를 개혁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주권자행동이다.”

촛불의 핵심은 공화주의였다. 공화국의 주인, 즉 주권자가 바로 인민임을 공화국역사상 처음으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력으로 ‘관철’시킨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주권자의 ‘일반의지’가 이미 종말을 앞둔 1987년 체제가 아니라, 제7공을 향해 물꼬를 트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섯째, 촛불혁명에는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첫째는 ‘누가 결정할 것인가(Quis judicabit?)’다.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모든 정치체에 던진 운명적인 질문에 관계되는 것이다. 탄핵 이후 권력진공상태에서, 그 결정권이 정동에 돌아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둘째, 실력으로 쟁취한 민주공화정의 사회경제적 ‘내용’이다. 경제민주화와 경제정의는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처방으로 이미 공론화되고, 상당한 합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촛불은 탄핵 이후 정치권력과 그 어떤 협상도 합의도 하지 못한 채, 순수성만 간직하고 자리를 떠났다. 신사회계약의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다.

토마 피케티는 자신의 방대한 연구결과를 이렇게 총결산했다. “불평등은 경제적인 것도 기술공학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그렇다. 비정규직도 임금도 집값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인 것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착근된 이후 한국사회는 급진시장주의의 공세, 시장의 ‘폭정’에 대책 없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문재인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는 명백히 정부의 실패다. 심지어 대장동 사태는 ‘지방’정부의 실패다. 즉, 현재 한국의 불평등체제는 명백히 ‘정치적인 것’이다. 

피케티는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불평등연구를 위한 일종의 계량적 척도로 베타값을 제시한 바 있다. 즉 β = 자본/소득이다. 소득이란 1년 동안 생산, 분배된 상품 및 서비스의 총액을 말한다. 그리고 자본이란 특정국가의 대개 민간자본총량을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개의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β는 5와 6 사이에 위치한다. 즉, 해당국의 자본총량이 5~6년간의 국민소득과 일치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일본과 이탈리아에서는 β가 6보다 크고, 미국과 독일에서는 β가 5보다 작다고 한다. 피케티의 장기추세 연구에 따르면 영국, 프랑스의 베타값은 18세기 앙시앙 레짐 즉 프랑스대혁명기와 19세기의 베타값이 1차 대전 전인 1900-1910년대 6~7보다 약간 낮다. 이후 베타값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 황금기의 U자 곡선을 그리며 하강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다시 상승해 지금 5~6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2014년 피케티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와 토론하는 자리에서 경제학자 이정우는 한국에서의 베타값이 당시 7을 기록한다고 했는데, 경제학자 정태인은 최근 10년 안에 9로 상승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프랑스대혁명기와 1차 대전 직전기와 비교해도 훨씬 높은 수치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 상위 10% 집단의 소득 비중이 50.6%, 그리고 최상위 1%의 소득 비중이 전체의 15%를 넘었다. 2010년 기준 상위 10%가 총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자면 미국 약 48%, 영국 약 42%, 독일 약 36%, 프랑스 약 33%, 스웨덴 약 28%다. 즉 한국은, 불평등의 대명사격인 미국을 초월해, 세계 최고의 불평등국가를 향해 돌진 중이다. 불평등은 민주주의의 공적이다. 불평등은 사회통합을 내부에서부터 해체하는 암적 존재다. 그렇다면 ‘정치적’ 불평등 레짐에 대한 대응은, 정치체제 즉 정당 체제에 일차적인 관할권이 있거나 적어도 특화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피케티 특유의 방대한 경험적 연구는, 이 문제에 대한 출발점을 암시한다. 1990년대 이후 한때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던 유럽과 미국의 선거좌파 정당들은, 고학력자의 정당 ‘브라만좌파’가 돼 민중과의 갈등관계에 봉착한다. 브라만좌파와 ‘상인우파’는 교대로 집권하면서 기존 불평등체제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공유한다. 전자는 인적자본의 축적을, 후자는 물적자본의 축적을 지향한다. 세계화는 양자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게다가 선거좌파는 특권계급화되면서 특권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세습되기를 원한다. 

피케티의 ‘브라만좌파’ 가설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첫째, 1950년대부터의 미국, 유럽의 선거정치의 장기추세로부터 도출된 그의 가설은 한국 정치에 당장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 브라만 좌파 가설을 일종의 작업가설로 가져가고자 한다.

둘째, 브라만좌파 가설이 분리추출한 핵심 가설 중 하나가 좌우대립 패러다임의 소멸이다. 이와 유사한 민주-반민주 구도의 해체(내지 약화)는 한국사회에서 오래전부터 공론화된 문제다. 

셋째, ‘선거좌파’라 해도, 국내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친화적 민주당계와 반신자유주의적 비민주당계 좌파정당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후자의 경우 브라만좌파 개념의 핵심인 고학력은 적용가능하다.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반드시 특권을 향유하거나 세계화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넷째, 386세대의 출발점이었던 ‘졸업정원제’는 고등교육의 대중화 즉 교육혁명과 교육균열의 시작점이었다. 1980년 초 대학교육이 가진 특권성은 이제 거의 해체됐다. 하지만 대학의 서열화, 계급화는 한국사회 모순의 축을 구성할 만큼 공고하다. 이미 그 먹이사슬의 상층부를 차지한 일부 n86세대와 브라만좌파의 동맹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들은 교육세계화의 승자다. 한국대학을 미국대학의 서열구조에 배열해, 그 사다리를 계속 확장하고 있다. 

다섯째, 브라만좌파 서사의 세계적 공통점 중 하나는 ‘위선’이다. 한국사회의 사회심리 중 ‘내로남불’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현상이다. 과거 스스로 노동자 민중의 벗으로 성장하고 투쟁했기에, 자신들도 공모해서 만들어낸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의 참담한 현실에 대해, 집단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져있다. 정치인들에게 흔한 ‘내로남불’은 그 뿌리를 브라만좌파의 아비투스에 둔 만큼,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여섯째, 정치적 내로남불은 단순히 수사나 애티튜드의 문제가 아니다. 점점 브라만좌파가 돼가는 한국 선거좌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제 새로운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를, 그저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해서는 개선이 불가능하다. 두 번의 정치혁명을 위해 노력했고, 두 번의 경제공황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우리 모두가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동정범임을 인정해야 한다. 

 

7공의 자리, 세대책무성으로서 ‘棧道는 태우고 城은 비워라’

우리는 지금 6공 시대를 살고 있다. 6월 항쟁으로 태어나 한 세대 가까이 존속한 6공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 이렇게 7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 사이 한국은 적어도 수치상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진입했다. 6공의 외형상 특징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고도화다. 그러나 이런 정치, 경제시스템의 성과에 반비례한 사회적 불평등이 이제 시스템을 위협하는 내압으로 전환된 것이 지금의 6공이다. 

6공은 민주주의의 형식적 공고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내용에 있어 실패했다. 6공 30년, 대통령이 7번 바뀌는 동안 실제 ‘대권’은 시장에, 자본에 넘어갔다. 불평등을 심화한 부동산의 ‘역사적’ 폭등과 ‘대장동’ 사태는 이제 이 시스템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 획기적 전환점이 됐다. 즉 민주공화정을 리셋해야 할, 낡은 ‘사회계약’을 갱신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앞에서 논한 베타값만 놓고 보면, 현재 한국사회는 피케티가 22세기 전세계가 도달할 것으로 예상한 수치(7미만)에 비해 한 세기 이상 앞섰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불평등체제는 지속가능한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이 불평등체제 구축의 ‘공범’으로서 n86세대의 ‘책무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MZ세대의 저출산은 이 한국사회 불평등체제 속에서 선택가능한 전략적 옵션이자 생물학적 사보타지다. 이는 저성장을 고착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속가능성에도 의문을 던진다. 기후변화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존재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멸할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사태와 사물을 그 뿌리에서부터 재구성해야 한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신사회계약의 방향으로 나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 6공의 시스템 예컨대 헌법119조에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적시된 경제민주화조항만으로 전대미문의 초불평등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촛불의 정치적 혁신성은 직접민주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테스트한 데 있다. 하지만 현재의 6공 시스템은 이런 새로운 공화주의적 요청을 담기에는 너무나 비좁다. 현재의 ‘대표’민주주의 체제 역시 직접민주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표성의 원리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셋째, 너무나 강고해진 재벌의 경제권력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본간 신협약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가.

넷째, 현재 한국경제는 금융세계화를 통제할 제도적 장치가 거의 부재한 조건이다. 또 실익없는 FTA체제로 말미암아 수출경제가 내수경제와 분리돼 성장과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다섯째, 남북관계를 비롯해 대미, 대중 등 한국의 외교노선 역시 앙시앙레짐 시대의 낡은 사고와 관행이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신사회계약의 내용으로 새로운 공화정을 예비한다는 것은, 지금의 n86세대에게는 ‘비우는 일’이 될 것이다. 지나온 길도, 권력에 대한 욕망도 비우는 일.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은 6공이 넘어진 그 자리일 것이다. 

 

 

글·이해영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전 한신대 부총장, 주요 저서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 『안익태케이스』(2019), 『임정, 거절당한 정부』(2019)등이,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 등이 있다.


* 이 글은 지난 23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전태일재단 등이 주최한 ‘민주화운동 40주년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것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발췌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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