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의미의 국제법은 주권 국가 간 관계라는 개념을 빼놓고서는 논할 수 없다. 1648년, 30년 전쟁이 종결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됐다. 서양에서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주권 국가 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성문화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국제법에 관한 이론이 탄생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이른 1530년대로 스페인 신학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의 글이 출발점이 됐다. 비토리아는 유럽 국가 간의 관계보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스페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과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 주민 간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더흐로트의 ‘칼의 원리’, 만민법으로 볼 수 없어
비토리아는 로마의 ‘만민법(Jus gentium)’을 바탕으로 스페인의 신세계 정복의 근거를 재검토했다. 점령한 땅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는가? 교황이 스페인 왕실에 수여한 땅이었는가?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하는 기독교인의 의무 때문이었는가? 비토리아는 이 모든 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보편적 권리인 ‘소통권(Jus communicandi)’, 즉 여행의 자유와 무역의 자유 그리고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했다고 설명했다.
정복자들이 인디언으로 칭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자유의 행사를 방해했기 때문에 무력으로 대응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땅을 점령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래도 원주민들이 계속 저항한다면 이들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해 약탈하고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것이다.(1) 비토리아에 따르면 스페인의 신세계 정복은 완벽하게 합법적인 행위였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여전히 ‘만민법’으로 불린 이 이론의 첫 번째 토대는 이처럼 스페인의 영토 확장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토대를 마련한 이는 17세기 초 네덜란드 외교관 휘호 더 흐로트다. 오늘날 더 흐로트는 특히 1625년에 발표된 논문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의 저자로 기억되고 존경받고 있지만 그가 현대 국제법에 남긴 첫 족적은 이보다 20년 전에 집필한 『포획법론(De jure praedae)』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당시 전 유럽에서 화제가 된 전대미문의 약탈 사건의 법적 정당성을 주장했다. 더 흐로트의 사촌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장은 포르투갈 상선을 공격해 구리, 비단, 도자기, 은 등의 화물을 탈취했다. 해당 화물의 가치는 당시 영국의 연간 총수입과 맞먹는 300만 플로린에 달했다.
이후 『해양자유론(Mare Liberum)』이라는 제목으로 별도 출간한 『포획법론』 15장에서 더 흐로트는 공해에서는 국가뿐만 아니라 군대를 보유한 민간 기업에도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박의 포르투갈 상선 공격은 합법적인 행위였다. 더 흐로트는 네덜란드의 무역 제국주의에 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더 흐로트가 『전쟁과 평화의 법』을 집필할 무렵 네덜란드는 영유권 주장을 해상에서 육지로 확대했고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브라질의 일부 영토를 빼앗았다.
더 흐로트는 상대편이 먼저 도발하지 않더라도 유럽인은 미개한 관습을 가진 모든 민족과 전쟁을 벌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유럽인에게 ‘유스 글라디이(Jus gladii)’, 일명 ‘칼의 권리’를 부여했다. “왕 그리고 왕과 동등한 권력을 부여받은 자는 자신과 백성에게 손해를 입히는 자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으며 특별한 손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자연법을 과도하게 위반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2) 즉, 더 흐로트는 유럽의 확장에 방해가 되는 자는 누구든지 공격하고, 정복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한 토마스 홉스와 존 로크
현대 국제법의 초석이 된 ‘소통권’과 ‘유스 글라디이’에 이어 식민지 개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두 가지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인구학을 논거로 제시했다. 유럽은 인구 과잉 상태이지만 수렵 채집인들이 사는 머나먼 땅에는 인구가 희박하므로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원주민을 몰살하고,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원주민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공존을 강요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3) 홉스의 주장은 후에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 수립의 근거로 활용됐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선포할 수 있었다면 이런 추론마저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존 로크는 널리 통용된 홉스의 견해를 한층 더 보강했다. 로크는 이미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들이 땅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유럽인은 그 땅을 박탈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토지 생산성 향상은 신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4) 17세기 말, 이로써 유럽의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일련의 근거들이 완성됐다.
18세기에 들어서자 국제법에 관한 저서들은 유럽 국가 간의 관계를 핵심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드니 디드로, 애덤 스미스, 이마누엘 칸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식민지배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식민지배의 철폐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발표된 논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글은 스위스 철학자 에메르 드 바텔의 『국제법(Le droit des gens)』(1758)이다. 바텔은 냉철한 시각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지구는 모든 인류의 것이며 인류에게 생계 수단을 제공하도록 설계됐다. 만약 모든 민족이 처음부터 광대한 국가를 건설하고 사냥, 낚시, 야생 과일로만 연명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지구는 현재 인구의 1/10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야만인들의 거주지를 더 좁은 구역으로 제한하는 것은 자연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다.”(5) 이 점에서 바텔은 앞서 언급한 국제법 선구자들의 연장선에 있지만 국제법을 좀 더 세속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영토 확장주의는 여전히 종교를 표방했다. 하지만 종교는 더 이상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핵심 근거가 되지 못했다.
바텔은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라 모든 주권 국가는 평등하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1814~1815년 개최된 빈 회의는 이런 원칙을 깨고 유럽 내부에 공식적인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5대 ‘열강’을 형성한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프랑스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유럽 전역에 군주제를 복원한 반(反)혁명 동맹을 강화할 목적으로 고안된 빈 체제는 엄격한 의미의 왕정복고 시기가 끝난 후에도 계속 유지됐다. 1883년,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법학자 제임스 로리머는 역사가 국가 평등의 원칙을 반박했다고 확신했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무방비 상태의 민족은 물론, 저항력이 있는 (특히 아시아의) 거대 제국과 다른 선진국까지 겨냥하자 새로운 질문이 제기됐다. 이런 국가들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이 국가들에 유럽 열강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빈 회의는 오스만 제국을 열강들의 협조체제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답했다. 이런 결정은 신앙의 차이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수십 년 동안 ‘문명화 기준’이라는 교리가 발전했다. 유럽의 기준에서 ‘문명화’된 국가만 유럽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교리였다.
문명화 기준은 문명화되지 않은 국가들을 세 가지 범주로 분류했다. 첫 번째 범주는 파리 코뮌이나 광신적인 이슬람 사회와 같은 범죄 국가(현대의 ‘불량국가’)다. 허무주의의 유혹에 굴복했다면 러시아도 이 범주로 분류됐을 것이다. 두 번째 범주는 유럽 문명의 규범에 도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럽의 규범을 구현하지도 않는 ‘반(半)야만’ 국가들로 중국과 일본이 이에 속했다. 세 번째 범주는 국제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간주할 수 없는 무능하고 쇠약한 국가(현대의 ‘실패한 국가’)다. “국제법은 공산주의와 허무주의를 단죄하고 금지한다”라고 저술한 로리머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범주에 속한 국가들을 국제 사회에서 배제하고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과거 빈 회의가 유럽의 운명을 결정했듯, 1884년 개최된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의 운명을 결정했다. 유럽 국가들은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에 합의했다. 국왕의 사유지 형태로 가장 큰 영토를 획득한 국가는 벨기에였다. 당시 벨기에는 국제법이라는 새로운 규율을 수용하고 있었다. 베를린 회의 개최 10여 년 전 브뤼셀에 설립된 국제법연구소는 새로운 식민지 확보를 환영했다.
1945년 이후 국제법은 미국의 산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새로운 국제 정상회담인 파리 평화회의가 열렸다. 1919년, 승전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독일에 대한 제재를 결정하고, 동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으며, 오스만제국 해체로 생긴 영토를 분할했다. 파리 평화회의는 국제기구 국제연맹(LN)을 탄생시켰다. 국제연맹은 ‘집단 안보’와 국가 간 지속적인 평화와 정의 확립을 보장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미국의 세력권으로 규정한 먼로 독트린을 ‘평화 유지’의 도구로서 국제연맹 규약에 포함 시켰다. 헤이그에 설립된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 역시 파리 평화회의의 산물이다. PCIJ의 정관 38조는 여전히 “문명화된 국가들이 인정하는 법의 일반적인 원칙”을 명시했다. 이 정관의 초안 작성자 중에는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배 업적을 600페이지에 걸쳐 찬양한 회고록의 저자도 있었다.
상원의 반대에 부딪힌 미국은 결국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은 승전국의 요구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미국이 빠진 4대 열강,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전신인 국제연맹 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독점했다. 이처럼 노골적인 불균형에 분노한 아르헨티나는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다. 1926년 브라질도 (라틴아메리카 1개국에 대한 상임이사국 지위 부여 요구가 거절당하자) 아르헨티나의 뒤를 따랐다. 1930년대 말까지, 8개국 이상의 크고 작은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상황은 역전됐다. 대부분 폐허로 변하거나 빚더미에 올라앉은 유럽 국가들은 패권을 상실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설된 국제연합(UN)은 국제연맹의 위계질서를 계승했다. 거부권을 갖게 된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은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됐다. 유엔의 탄생은 서구 독점 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세력이 크게 약화된 미국, 프랑스, 영국 외에 소련, 중국이 안보리 신규 이사국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이후 20년 동안 탈식민지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유엔 총회는 미국과 동맹국을 점점 더 불편하게 만드는 요구와 결의안을 논하는 장이 됐다.
카를 슈미트는 1950년 출간한 논문 『대지의 노모스(Le Nomos de la Terre)』에서 19세기 국제법은 특히 유럽 중심적인 개념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슈미트는 외교의 일반적인 개념, 이론 및 어휘를 결정하는 ‘문명’, ‘인류’ 혹은 ‘진보’와 같은 보편적인 개념들조차 ‘유럽’이라는 접두사가 붙을 때만 보편성을 인정받았다고 설명하며 이제 이런 유럽 중심의 낡은 질서가 쇠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7) 그렇다고 유럽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주도권을 물려줬을 뿐이다. 1945년 이후 국제법은 더 이상 유럽이 아닌 미국이 주도하는 서구의 산물이 됐다.
강대국들, 국제법 무시하며 침략전쟁 벌여
그렇다면 국제법의 본질은 무엇인가? 토머스 홉스는 “검이 없는 약속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8)라는 글을 통해 법을 만드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권위라는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 국제법을 제정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실체적 권위가 없다면 국제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대다수 국제법 학자나 변호사들에게는 충격적인 결론이다. 그렇지만 19세기 가장 위대한 자유주의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 역시 홉스의 결론에 동의했다. 단명한 체제인 프랑스 제2공화국은 프로이센의 지배에 저항하는 폴란드 반군을 지원했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자 밀은 1849년 “국제적 도덕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고 새로운 규칙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9)
밀은 혁명에 연대했다. 당시 국제법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공허한 문구에 불과했고 국제법 전문 법률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1880년대 초, 솔즈베리경은 영국 의회에서 “‘법’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국제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 편찬자들의 편견이 국제법을 좌우하며 국제법을 집행할 수 있는 재판소도 없다”라고 일갈했다.(10) 이로부터 100년 후, 국제법은 본격적으로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유엔 헌장이 제정되고 국제사법재판소가 설립됐다. 국제법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법조인들이 생겨났으며 국제법을 가르치는 대학의 수도 계속 증가했다.
칼 슈미트는 1918년 이후 발전을 거듭해 지금도 계속 진화 중인 국제법의 특징으로 극도로 차별적인 성격을 꼽았다.(11) 지금껏 국제법은 체제를 주도하는 국가들이 벌인 전쟁은 국제법을 보존하기 위한 공정한 개입으로 인정했다. 반면 다른 국가들이 벌인 전쟁은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 행위로 간주했다. 이런 이중 잣대는 계속 강화됐다. 약소국에 국제법은 현실 세계에서 아무런 집행력이 없는 실체 없는 욕망, 즉 단순한 의견에 불과하다.
반면 강대국들은 점점 더 국제법을 내세워 또는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다른 국가를 침공하는 것은 패권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제법의 원칙을 대놓고 우회하거나 무시한 일방적인 침략 전쟁들이 이를 증명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를, 중국은 베트남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패권국 반열에 들지 못한 튀르키예도 키프로스를, 이라크는 이란을,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침공했다.
국제법 위반하고도 책임지지 않는 미국
회원국의 주권과 영토 보존을 헌장에 명시한 유엔은 국제법의 궁극적인 현신이다. 그러나 유엔이 설립되던 순간에도 미국은 국제법을 위반했다. 유엔 창설 회의장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옛 스페인 요새 내 군사기지에서, 미군 첩보팀은 각국 대표단이 본국과 주고받는 통신문을 감청했다. 해독된 통신문은 다음 날 에드워드 R.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에게 보고됐고 그는 아침 식탁에서 그 내용을 검토했다. 역사학자 스티븐 슐레진저는 “유엔은 애초부터 미 국무부가 구상하고, 두 명의 미 대통령이 직접 관여 및 주도하고 (...) 미국의 힘으로 추진한 미국의 계획”이라며 미국의 체계적인 첩보 작전에 찬사를 보냈다.(12)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1946년 통과된 유엔의 특권 및 면책에 관한 협약은 유엔의 재산과 자산은 “소재지와 보유주체에 관계없이 수색, 징발, 몰수, 수용 및 기타 모든 형태의 집행적·행정적·사법적·입법적 강제 조치로부터 면제된다”라고 명시한다. 하지만 2010년,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이 규정을 위반했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2009년 7월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비밀정보기관들에 전문을 보내 유엔 사무총장과 안보리 4개 상임이사국 대사들의 비밀번호와 암호화키를 입수하고 유엔의 핵심 관료들과 평화유지 및 정치적 임무를 맡아 파견된 책임자들의 생체정보와 이메일 주소, 신용카드 번호 등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클린턴 국무장관과 미국 정부는 ‘국제법의 성역’ 유엔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파렴치하게 위반하고도,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미국의 그 어떤 정책 책임자도 과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저지른 만행에 책임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1993년, 안보리 결의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가 설립됐다. 이 재판소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제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를 기소하는 임무를 맡았다. 캐나다 출신인 ICTY 검찰총장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긴밀히 협력해 미국과 유럽이 불편하게 여기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인종청소 혐의를 집중시켰다. 똑같이 대량학살을 자행한 크로아티아인들은 기소를 피해갔다. 크로아티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군대를 훈련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부자와 빈자에게는 다른 법이 적용된다’
ICTY 검찰 총장은 1999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폭격 등 세르비아와의 전쟁 중에 나토가 벌인 행위 역시 조사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너무나 논리적인 결과였다. 나토 공보관이 지적했듯이 “ICTY를 설립하고, 비호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것은 NATO 회원국”이기 때문이다.(13) 다시 한 번, 미국과 동맹국들은 ICTY를 통해 전쟁에서 패한 적국을 범죄 국가로 만들고 자신들은 법적 책임을 피해갔다.
미국의 촉구로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1998년 ICC 구상 단계부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ICC 정관 초안이 기소 범위를 비서명국 국민까지 확대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자 미국의 군인, 조종사, 고문관 및 여타 범죄자들이 기소될 처지에 놓였다. 이에 분노한 클린턴 행정부는 미군이 주둔했거나 주둔 중인 100여 개 국가와 급히 양자 협약을 체결해 미국 시민의 기소 가능성을 봉쇄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종료를 몇 시간 앞두고 ICC 설립 정관 서명을 의회에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의회가 절대 ICC 가입을 비준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02년 공식 설립된 ICC는 타협적인 인사들로 채워졌다. 예상대로 ICC는 미국이나 유럽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작전에 대한 조사를 거부하고, 아프리카 국가에는 철퇴를 내렸다. ‘부자와 빈자에게는 각기 다른 법이 적용된다’는 암묵적인 원칙을 잘 보여준 것이다.
‘국제법의 수호자’, 안보리도 마찬가지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안보리는 이라크에 즉각적인 제재를 가하고 10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군사적 대응에 나섰다. 반면 이스라엘은 반세기 넘게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점령하고 있지만 안보리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1998~1999년, 유고슬라비아 공습 승인 결의안 채택이 불발되자 미국과 동맹국은 나토를 동원했다. 이는 침략 전쟁을 금지하는 유엔 헌장을 노골적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미국이 임명한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나토의 공격은 합법적이지는 않지만 정당한 개입이었다고 변명했다. 이로부터 4년 후, 프랑스의 거부권 행사 위협에 가로막힌 미국과 영국은 안보리를 우회해 이라크를 침공을 강행했다. 이때에도 코피 아난 사무총장은 다시 한 번 침략 전쟁을 사후 승인했다. 유엔은 미국과 영국을 ‘점령국’으로 인정하고 유엔의 지지를 보장하는 결의안 1483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무시되고,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바로 국제법이다.
냉전 시절 수립된 세계 질서의 차별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핵확산금지조약이다. 1968년 체결된 이 조약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만 수소폭탄을 보유 및 배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이스라엘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오래전부터 핵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과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강대국들은 제재를 가한다. 국제법의 역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다.
위선적인 법도 없는 것보다 낫다?
그렇다면 국제법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가? 적어도 한 분야에서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모든 국가의 해외 주재원은 국제법에 의거해 외교적 면책권을 보장받는다. 이는 설사 주재국이 파견국에 전쟁을 선포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존중되는 원칙이다. 그렇다 보니 모든 강대국 대사관은 물론 대부분의 약소국 대사관에도 불법 첩보 임무를 전담하는 요원들이 넘쳐난다. 이런 모순은 국제법의 권위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보면 국제법은 실제로 국제적이지 않으며 실질적인 법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제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패권국과 동맹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런 힘을 의견이라고 불렀으며 왕국의 정치적 안정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로 여겼다. “강자의 권력은 오직 민중의 의견과 믿음에서 비롯된다.”(14) 아무리 비현실적이라도 국제법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패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가치로 포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국제 사회’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예다. 패권은 항상 강제와 동의를 동시에 수반한다. 국제무대에서 강제는 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의를 확보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강제보다 더 약하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국제법은 국가의 행동에 편리한 구실이 되거나 현실과 단절된 채 도덕성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유토피아 혹은 변명(utopia or apology)’이 아니라 ‘변명으로서의 유토피아(utopia as apology)’, 즉 리비아 파괴에 대한 변명으로서의 보호책임, 이란의 숨통을 죄는 제재에 대한 변명으로서의 긴장완화 추구 등 상반된 두 입장을 융합할 수도 있다. 국제법 옹호자들은 “위선이란 악이 미덕에 바치는 경의”라는 라로슈푸코의 유명한 격언을 인용하며 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태보다는 남용되는 법이라도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격언을 뒤집으면 위선이란 악의적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악이 꾸며낸 가짜 미덕이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나 평화 유지 명목으로 벌어진 혹은 유발된 무자비한 전쟁이 이를 증명한다.
글·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
193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중국, 미국, 아일랜드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1962년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의 편집을 맡은 바 있고, 지금도 이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있다. 현재 UCLA에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A Zone of Engagement」(1992),『The Origins of Postmodernity』(1998), 『The New Old World』(2009) 등이 있으며,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창비, 1991), 『역사적 유물론의 궤적』(새길, 1994),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까치, 1997),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이매진, 2003) 등이 있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Francisco de Vitoria, 『Relecciones sobre los Indios』(1538~1539), Madrid, 1946.
(2) Hugo Grotius, 『Le Droit de la guerre et de la paix 전쟁과 평화의 법』, vol. 2, chap. XL,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콰드리지(Quadrige)’ 총서, Paris, 1999.
(3) Thomas Hobbes, 『Léviathan 리바이어던』, 2부, ‘De l’État 국가에 관해’, chap. 30, ‘De la charge du représentant souverain 군주의 책임에 관해’. (4) John Locke, 『Du gouvernement civil 시민정부론』, chap. IV, ‘De la propriété des choses 재산 소유권에 관해’.
(5) Emer de Vattel, 『Le Droit des gens 국제법』, 1권, chap. XVIII, ‘De l’établissement d’une nation dans un pays 국가 내 민족 수립에 관해’, § 209.
(6) James Lorimer, 『Principes de droit international 국제법의 원칙』, Bruxelles/Paris, 1885(초판 1883).
(7) Carl Schmitt, 『Le Nomos de la Terre 대지의 노모스』, PUF, ‘콰드리지(Quadrige)’ 총서, Paris, 2012(초판 2001).
(8) Thomas Hobbes, 『리바이어던』, 2부, chap. 17, ‘Des causes, de la génération et de la définition de l’État 국가의 원인, 생성, 정의’.
(9) John Stuart Mill, 『La Révolution de 1848 et ses détracteurs 1848년 혁명과 혁명 비판론』, Librairie Germer Baillière, 1875.
(10) Lord Salisbury, 상원 연설, 1887년 7월 25일.
(11) Carl Schmitt, 『Die Wendung zum diskriminierenden Kriegsbegriff』, Berlin, 1988. 이 저서의 프랑스어 번역본은 『Deux textes de Carl Schmitt. La question clé de la société des nations. Le passage au concept deguerre discriminatoire 카를 슈미트의 두 원고. 국제연맹의 핵심 과제. 차별적 전쟁 개념으로의 전환 』(Pedone, Paris, 2009)에 삽입됐다.
(12) Stephen Schlesinger, 『Act of Creation: The Founding of the United Nations』, Boulder, Westview, 2003.
(13) James Shea, 1999년 5월 17일.
(14) Thomas Hobbes, 『Béhémoth ou le Long Parlement 베헤모스, 또는 장기의회』, 대화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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